상원의원은 말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아르장스 후작이나 피론, 그리고 홉스와 네종 씨는 야인이 아닙니다.”
“나는 디드로를 싫어해요. 그는 관념론자이고, 호언장담하기를 좋아하고, 혁명가면서도, 속으로는 신을 믿고 있으며, 볼테르보다도 더 완고해요.”
“나는 양식 있는 사람이오. 입만 벌리면 줄곧 포기와 희생을 설교하는 당신의 예수에게 나는 미칠 수 없어요. 그건 거지들에 대한 구두쇠의 충고입니다. 포기라고! 왜요? 희생이라고! 무엇을 위해서요? 나는 이리가 다른 이리의 행복을 위하여 제 몸을 희생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자연대로 살아갑시다.”
“즐겁게 삽시다. 인생, 그것이 전부예요. 인간의 다른 미래가 단 곳에, 저 천국인지 지옥인지 어딘가에 있다는 그런 기만적인 말을 나는 믿지 않아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생명만 있을 뿐입니다. 현실을 추구합시다. 끝까지 팝시다. 맨 밑바닥까지 파 들어갑시다! 진리를 감지하고 땅속을 파헤쳐서 진리를 잡아야 합니다.”
“주교님, 인간의 불멸이란 도깨비불에 지나지 않아요.”
“천국 같은 건 잠꼬대에 불과해요.”
“무한한 것에 속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소. 나는 허무요. 나는 자칭 상원 의원 ‘허무’ 백작이오. 태어나기 전에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까? 천만에. 죽은 후에 나는 존재할까? 천만에. 나는 무엇인가? 유기적으로 응결된 약간의 먼지일 뿐. 이 지상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향락할 것인가? 내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소. 고통은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 허무로. 그러나 이미 고통을 받은 뒤입니다. 향락은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 허무로. 그러나 이미 향락한 뒤입니다. 나의 선택은 이미 결정되어 있어요.”
“무덤 뒤에는 누구에게나 다 똑 같은 허무가 있을 뿐이오. 당신이 방탕자 사르다나팔루스였든, 성자 뱅상 드 폴이었든 간에 다 똑 같은 무로 돌아가요. 그게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살아야 해요. 당신이 당신의 자아를 간직하고 있는 동안 그걸 사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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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원의원은 유물론을 펴는데, 아마 필자를 포함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는 이 유물론을 밑바탕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한한 신의 속성과 천국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유기적으로 응결된 약간의 먼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 상원의원의 유물론의 특징은 우선 현실에서의 삶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이익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개인주의. 또 현실 너머는 아무 것도 없으므로 현실에서 즐거움을 맛보자는 쾌락주의, 그리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허무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19세기 소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인 빅토르 위고는 상원의원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싣기 전에 그 캐릭터를 이렇게 먼저 설명해 둔다.
“상원의원은 영리한 자여서 자기 행로에 끼어드는 모든 것, 이른 바 양심이며 신앙이며 정의며 의무 같은 장애물에는 개의치 않고 똑바로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나이였다. 그는 목적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갔고, 승진과 이익의 도상에서 단 한 번도 비틀거려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전에 검사였는데, 성공하면서 점점 성질이 온화해졌다. 결코 악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재치가 있고 스스로 에피쿠로스의 제자라고 믿을 만큼 충분히 학식도 있었지만, 아마 피고르브룅이 그린 인물밖에 안 되었으리라. 그는 영원 무궁한 것이나 ‘주교 영감의 유치함’ 같은 것을 곧잘 유쾌하게 비웃었다.”
위고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유물론적 철학을 가진 이 상원의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그가 너무 이익에 충실하고 현실만 아는 다소 속물적 경향이 있는 인물로 그리지 않는가? 특히 피고르브룅이라는 외설소설 작가가 그린 인물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위고의 말은 들어보면 다소 분명해진다. 이것이 상원의원의 유물론 때문인지, 아니면 그 유물론과 결합해 있는 그의 다른 사상, 이를테면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하자는 생각이나, 현실에서 쾌락을 충분히 맛보는 게 낫다는 그의 주장 때문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어쨌건 주교에 비해서는 조금 질이 떨어지는 인물쯤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종교나 철학에 대해서는 아마 위고가 19세기 프랑스인 치고는 조금은 보수적인 면도 없잖아 있는 듯 하다. 이것은 더 살펴봐야 할 내용이다.
..................................................................................2016-09-09, 스콜라 지식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