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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 특집 속리산 비로산장] YS의 ‘대도무문’ 탄생한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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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희
입력 2022.10.12 09:27
사진(제공) : 한효희 기자
부모님 떠난 후 막내딸이 가업 이어
콜 前 독일총리 등 명망가들에 입소문
비로산장 앞마당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떡하니 자리한다.
속세를 떠난 사내가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내는 산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의 아내는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내어줬다. 작은 움막은 곧 산장이 되었다. 사내는 산장 일을 하며 가장 노릇을 했고, 여섯 남매를 키워 냈다. 50년 넘게 산장을 지킨 부부는 백발노인이 되어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산장에서 걸음마를 뗀 막내딸은 이제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산장지기가 되었다. 속리산 비로산장 이야기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종갓집 종손
속리산 세심정을 지나 금강골로 들어서면 고즈넉한 산장이 하나 있다. 1965년 문을 연 비로산장이다. 이 산장의 탄생 뒤에는 한 남자의 슬픔이 있다. 산장을 처음 설립한 고故김태환씨는 원래 공무원이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속리산에 왔다가 산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었다. 그는 그길로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 땅을 팔아 속리산에서 기념품 사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 속리산은 설악산과 더불어 수학여행 일번지로 꼽힐 만큼 최고의 관광지였다. 그는 사진이나 배지 같은 여러 기념품을 납품하는 큰 도매상을 차렸다.
장사경험이 없었던 그의 사업이 순탄할 리 없었다. 서울 충무로까지 가서 공들여 기념사진 앨범을 만들었지만 짝퉁 복사본이 더 불티나게 잘 팔렸다. 외상으로 납품한 물건들은 수금을 제때 하지 못했다. 그렇게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쫄딱 망했다.
종갓집 종손이었던 그는 동네 사람 얼굴 보기가 창피해 차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법주사로부터 허락을 받아 속리산 금강골에 있던 표고버섯 재배용 움막에 기거했다. 속리산에 놀러 온 사람들이 지나며 움막을 들르게 되었고, 그렇게 움막은 산장이 되었다.
지금 산장을 관리하는 사람은 김태환씨의 막내딸 김은숙씨다. 그는 1970년대가 비로산장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그때는 속리산이 신혼여행 메카였죠. 신혼부부가 오면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문장대까지 올라갔어요. 그때는 문장대에도 여관이 3개나 있었어요. 사진사가 가이드 역할도 했는데 신혼부부를 데려오면 산채정식을 내주고 산장에서 첫날밤을 보냈어요.”
신혼부부만 산장을 찾는 건 아니었다. 비로산장은 고시생들 사이에서 영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무전여행이 유행하던 때라 빈손의 대학생도 산장을 자주 찾았다. 한 대학생은 두 달 동안 산장에서 식구로 지낸 적도 있었다. 그 대학생은 40년이 지난 뒤 노신사가 되어 부인과 함께 산장을 다시 찾아왔다.
“노신사가 ‘어르신,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라며 아버지께 인사드렸어요. 아버지는 환하게 반기시며 ‘야! 너 ○○○ 아니냐? 너 장관 해먹었잖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니까 노신사가 깜짝 놀라서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반문하니 아버지께서 ‘너 나오는 거 맨날 언론에서 봤어’라고 답하셨어요.”
김은숙 주인장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린 작품 ‘엄마 생각’.
아버지의 산장을 이어받은 막내딸
남편과 함께 한평생 산장을 지킨 이상금 여사는 2010년 88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아내가 떠나고 2년 뒤, 김태환 선생도 9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산장을 맡을 사람은 막내딸 김은숙씨 말고는 없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산장에서 크고 자란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산장으로 돌아와 부모님 일을 도왔다. 6남매 중 속리산에서 지낸 시간이 가장 많고 나이도 어리다 보니 자연스레 산장 일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제 그도 산장에서 보낸 세월이 30년을 넘어간다.
“아홉 살까지 산장에서 살았어요. 아버지가 매일 아침 자전거로 등교시켜 주셨어요. 짐자전거 뒤에 언니와 저를 태우고 달그락거리는 비포장길을 달리셨죠. 그러고서는 학교가 끝날 때까지 마을에서 우리를 기다리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매일 데려다 주셨는지 모르겠어요.”
친구도 TV도 없었던 산속에서는 자연이 친구이자 놀이터였다. 마당에 있는 돌멩이 하나하나가 전부 장난감이었다. 어린 소녀는 흐르는 물을 친구삼아 이야기하고 물고기들과 놀았다. 개울에서 혼자 머리를 감다가 홀라당 뒤집혀서 물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겨울에는 마당 앞 계곡이 얼면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썰매를 타며 하루 종일 놀았어요. 눈 쌓인 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도란도란 이야기하시며 오빠들이 입을 스웨터를 뜨개질하셨죠. 저와 언니들은 그 옆에서 동화책을 읽었어요. 유년시절 비로산장 가족의 모습이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따뜻하게 남아 있어요.”
비로산장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세 자매.
아버지는 종종 어린 딸을 번쩍 업고는 주변에 있는 절로 향했다. 그때는 비로산장 주변에 절이 8개나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홀로 법당에 앉혀놓고 노스님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적막한 법당에 앉아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렸다. 소녀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황금색 동상이 뭔지 몰랐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김은숙씨는 대학에서 불교에 심취해 머리를 깎을 뻔했다.
그는 나중에 대구 큰오빠 집에서 학교를 다니며 미술을 전공해 대학원까지 나왔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아버지는 그림쟁이를 천대하던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했다. 그는 못다 이룬 자신의 재능을 물려받은 딸을 응원했다. 순수추상화를 전공한 김은숙씨는 도시에서 개인전을 열고 강사생활을 하며 세속의 삶을 살았다.
유년시절의 추억 때문일까. 산장에 대한 애착이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는 서른이 넘어 다시 산장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도우러 잠시 들른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몇 년이 되었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산장을 맡는다는 것의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지만 김은숙씨는 아직도 산장 곳곳에서 그들의 숨결을 발견한다.
처마 밑에는 김태환씨의 붓글씨와 현판이 가득하다.
김영삼 대통령의 휘호가 탄생한 곳
비로산장 처마 아래에는 현판과 붓글씨가 가득하다. 모두 김태환씨의 작품이다. 그는 서각과 서예 재주가 뛰어나 붓글씨를 받으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생전에 비로산장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그의 휘호로 유명한 ‘대도무문大道無門’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아버지는) 서각과 독서를 하셨다. 날마다 마당을 빗자루로 쓰시면서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를 살포시 미소 띤 얼굴로 읊으셨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쓰기를 좋아하셨고 새해가 되면 정재계 인사들과 학자들이 붓글씨 받으려고 선생을 찾아와 큰절을 올리곤 했다. 모정 선생(아버지)은 그들에게 사훈, 가훈, 원하는 글씨들을 써주셨다. 그들이 봉투를 내놓으면 ‘나는 글씨 장사하는 사람 아니오’라며 보내셨다. 이런 선생을 사람들은 ‘모정 선생님은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야’라고 우러르곤 했다.’ -다섯째 딸 김옥란씨가 아버지를 회상하며 쓴 글 중 일부.
명망 있는 인사들이 산장을 자주 찾았지만 부부는 베풀고 돕는 삶을 더 의미 있게 여겼다. 인자하고 자비심이 깊었던 부부는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산장에서 무료로 재워 주고 먹여 줬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산장에서 10년을 함께 살았던 이도 있다.
“부모님은 계산법이 없으신 분들이었어요. ‘그냥 가세요, 형편껏 주세요’라는 말을 많이 하셨어요. 특히 사정이 딱한 분들에게 돈 받는 걸 굉장히 어려워하셨어요.”
지금도 비로산장에 가면 누구나 따뜻한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 그 옛날 이상금 여사가 목마른 사람들에게 손수 물을 떠다줬듯 자손들이 부모님의 따뜻한 마음을 잇고 있는 것이다.
처음 산장을 지을 때 심었던 가문비나무 두 그루는 이제 산장을 내려다볼 정도로 자랐다.
주말에는 산장이 산속 응급실
산장지기의 하루는 다사다망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산장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환기한다. 날씨가 쌀쌀할 때는 난방 관리도 중요한 업무다. 생필품이 부족하면 속리산 마을이나 보은 읍내로 나가 직접 지게를 지고 물건을 나른다. 산장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방문하는 손님도 다양하다. 단골손님부터 일반 등산객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응대하고 쉬어갈 자리를 내어준다. 주말에는 평일보다 세 배는 더 바쁘다.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조난자가 많아 비로산장이 응급실 역할도 했다. 속리산을 가볍게 보고 온 초보 등산객들이 탈진하거나 다치면 비로산장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보살펴줬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요즘에도 조난자는 종종 발생한다. 특히 해가 일찍 떨어지는 가을철에 늘어난다. 어둠 속에서 산을 헤매던 조난자들은 산장의 불빛을 보고 들어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한번은 수녀님이 하산하다가 너무 어두워져서 산장에 들렀어요. 손전등을 드렸더니 비용을 주신다는 걸 ‘그렇게 주시고 싶으시면 가서 기도나 해주세요’라고 말하며 안 받았어요. 나중에 수녀님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덕분에 안전하게 하산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매일 그 손전등을 앞에 놓고 기도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때마침 산장을 지나가던 한 등산객이 다가와 대일밴드가 있냐고 물어본다. 주인장의 작은언니가 구급함에서 반창고를 가져와 건넨다.
“지금처럼 산장에 있으면 이런저런 일들이 끊이질 않아요.”
비로산장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명소다. 한국적 자연미가 빼어난 속리산에 위치해 한국의 자연과 음식, 문화와 전통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관광지다.
한 호주 유학생은 일 년에 대여섯 번 친구들을 데리고 산장을 찾아와 비로산장 가이드라는 별명이 생겼다. 어떤 외국인 교수는 자신의 생일에 한국인 여자 친구를 데리고 산장을 찾아왔다. 한 번은 거구의 백인 남성이 비로산장을 찾은 적 있다. 그는 정성들여 차린 음식을 먹고는 깍듯이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산장을 나섰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을 방문한 헬무트 콜 독일 총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쓴 대도무문 글씨 사본.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곳
“쉼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살아가잖아요. 비로산장이 누구나 푹 쉬어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하고 푸근한 곳이오.”
언제까지 산장을 운영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주인장은 ‘기자님은 언제까지 살 거예요?’라고 반문한다. 말문이 턱 막힌다. 산장은 그에게 유년의 추억이 서린 고향이자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집이다. 그에게 비로산장은 생명과 예술의 원천이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터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터가 사람을 선택한다고요. 내가 이곳에 계속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산이 나를 허락해 주고, 터가 나를 선택해 주고, 하늘과 사람의 도움이 맞물려 산장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어떨 땐 숙명 같은 걸 느끼기도 해요. 법주사, 국립공원, 기관 관계자분들의 도움 없이는 산장이 유지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에 감사할 뿐입니다.”
인자하기로 유명했던 김태환·이상금 부부.
산속에서 지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주인장은 산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의 소망은 산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자연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당에 쏟아지는 햇빛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혼자 느끼는 게 안타까워요. 이 공기와 햇빛을 도시의 빌딩숲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속리산 금강골에 가면 아버지와 딸의 일생이 담긴 산장이 있다. 속세를 떠나 자유롭고 싶다면, 비로산장으로 가라.
비로산장 이용 가이드
법주사탐방지원센터에서 비로산장까지 4km 거리이며, 걸어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세심정까지 도로가 나있어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으나, 봄·가을 성수기에는 모든 차량 출입이 통제된다. 세심정에서 비로산장까지는 600m 정도 거리다. 하루 숙박비는 2인 방 한 칸에 5만 원이고 최대 수용 인원은 10명이다. 현재 비로산장에서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투숙객은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간단한 음식을 가져와 끼니를 해결하면 된다.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는 이용 가능하다. TV는 없지만 전기는 들어오며 휴대폰 신호도 잘 잡힌다. 겨울에 따뜻하게 전기 난방이 되고 간단한 침구가 제공된다. 침낭을 직접 가져와도 된다.
문의 043-543-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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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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