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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스케치] 발왕산 엄홍'길'! 사람 이름 아니고, 길 이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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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범
입력 2022.10.27 09:41
사진(제공) : 이신영 기자
모나파크에서 발왕산 정상 잇는 6km 등산로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발왕산(1,458m) 정상이 단풍으로 물들었다. 산림청과 평창군에서 세운 평창 평화봉이 정상에 서있다.
“예쁜 오솔길이 이어지고, 정상 부근에는 예사롭지 않은 주목 숲이 있어요. 주목 숲에서 엄청난 에너지에 감동 받았고, 대자연의 신비를 느꼈어요. 긴 세월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만들어진 주목의 형상은 마치 산신을 보는 것 같았어요. 발왕산이 대단한 산이라 생각했어요.”
발왕산에 ‘엄홍길’ 코스가 생겼다. 산길 이름이 ‘엄홍길’인 것. 2018년부터 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청소년 아웃도어 체험의 일환으로, 발왕산 산행을 여러 번 했는데 “이 산길은 마치 내가 살아온 길을 닮았다”고 하여 ‘발왕산 모나파크(구 용평리조트)’에서 ‘골드 등산로’란 명칭을 ‘엄홍길’로 바꿨다. 스키장 골드라인 옆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산악인 이름을 딴 산길이 된 것.
정갈한 분위기의 독일가문비나무숲. 애니포레 입구에 있다.
등산로는 모나파크 애니포레 더 골드 스낵 판매점에서 출발해, 북서쪽 지능선을 타고 올라 정상까지 이어진다. 해발 760m에서 발왕산 정상 1,458m까지, 고도 700m를 끌어올려야 하는 쉽지 않은 산길이다. 그럼에도 엄홍길 대장이 등산 초보인 청소년들을 데리고 오를 수 있었던 건, 정상부에 케이블카가 있어 어떻게든 오르기만 하면 하산은 수월했기 때문이다.
엄홍길 입구에 너른 주차장이 있어 산행은 시작부터 쾌적하다. 평균 고도 700m를 ‘해피 700’이라는 슬로건으로 내건 평창답게 들머리 고도가 760m에 이른다. 산 입구에는 엄홍길 코스 안내문과 등산지도가 있어 반갑다. 대관령이 좋아 이곳에서 24년째 살고 있는 이희정씨와 태백산이 고향인 강릉 사나이 손호윤씨가 함께한다.
대형 스키장이 곁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숲은 우람하다. 소나무, 철쭉이 빽빽하고 전설 하나쯤 품고 있을 산사나무 노거수도 있다. 군데군데 보이는 돌담 흔적, 화전민들이 마을을 이뤘을 정도로 먹고 살기 나쁘지 않았던 곳이 발왕산이다.
엄홍길 대장의 이름을 딴 등산로 ‘엄홍길’은 모나파크에서 발왕산 정상까지 산길이 이어진다.
고도 높일수록 단풍 화사해
햇살을 삼킨 짙은 숲은 애니포레 입구에서 주도권을 놓는다. 무인카페와 알파카목장, 독일가문비나무 숲이 있어 한 숨 돌리기 제격이다. 유럽의 고풍스런 침묵 수도원에 온 듯한 착각, 반듯하게 뻗은 독일가문비나무 숲은 정갈하여 공기마저 무게감이 느껴진다. 조명처럼 숲 사이로 비스듬히 햇살이 쏟아지고, 벤치에 앉아 읽고 싶었던 고전을 꺼내 독서를 한다면 몸과 마음이 정화될 것만 같다.
임도마냥 너른 산길을 따라 고도를 높인다. 숲 속 무대인 원형 쉼터, 뼈 속까지 시린 시원한 물이 졸졸 흐르고, 쓰러진 나무로 만든 자연 그대로의 벤치가 편안해 보인다. 경치는 없으나 피톤치드로 가득한 우아한 공간. 진짜 산행은 지금부터다. 좁고 가파른 산길이 얼른 고도를 높이라고 독촉한다.
낙엽이 절정을 이룬 발왕산 엄홍길 등산로.
재킷을 입어야 했던 쌀쌀했던 공기는 사라지고, 강렬한 햇살에 데워진 공기에 걸음도 슬로비디오가 되고 있다. 경치 한 점 없는 가파른 산길도 지루하지 않은 건, 고도를 높일수록 숲이 화사해지고 있어서다. 노랑 빨강으로 번지는 발왕산의 속내에 눈이 즐겁다.
해발 1,300m를 넘어서자 두런두런 사람들 말소리가 들린다. 정상 부근의 ‘천년주목숲길’을 걷는 관광객들이다. 무장애 데크로 3.2km를 연결해 체력이 약한 사람도 케이블카를 이용해 고산 주목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오늘의 주인공인 거대 주목이 엄홍길 대장 말처럼 신령스럽게 한 그루, 한 그루 다가온다. 6km의 오름길 끝에 드러나는 정상의 너른 데크. 흰색 비둘기들이 비상하는 모습을 탑으로 만든 평창 평화봉이 3시간의 수고를 도닥이며 뾰족하게 솟았다. 전망데크에 서자 강릉 앞 바다를 비롯해 내륙으로 첩첩산중이 펼쳐진다. 진정 산의 나라임을 실감하며 백두대간 황병산 자락을 눈으로 찾는다. 경치만 트이면 유명한 산과 산줄기를 찾는 게 습관이 되었다.
발왕산 정상 부근의 천년주목숲길. 주목 외에도 단풍으로 물드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있다.
발왕산 모나파크의 명물인 리조트 내의 ‘발왕산성 일루미네이션’.
땀 눈물범벅으로 정상 올랐을 청소년들
엄홍길 대장은 이 코스를 “함께하면 넘지 못할 것이 없다는 화합의 기운이 가득한 길”이라고 했다. 6km 동안 고도 700m를 높이는 건, 초보자에겐 쉽지 않은 도전이다. 포기하려 들거나 철퍼덕 주저앉는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북돋고 파이팅을 외치며 올랐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땀 흘린 노력이 시원한 정상 경치로 보상 받는 순간 아이들은 한 뼘 더 자라 있고, 인솔자들은 산행의 보람을 느끼지 않았을까.
고속도로 같은 천년주목숲길을 이어서 걷는다. 몇 년 전 발왕산 모나파크는 정상부에 잘 보전된 주목 군락지를 발견했고, 수년간 산림청·평창군과 협의해 주목을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고, 식생을 살린 무장애 데크길을 만들었다. 사람의 발로 인한 식생 파괴는 최소화하면서 원래 있던 정상부의 케이블카 정류소인 드래곤캐슬과 연계했다.
해발 1,300m대에 이르면 아름드리 주목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발왕산이 좋아서 이곳에서 24년을 살아온 이희정씨가 주목의 품에 안겼다.
발왕산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른 천년주목숲길. 계단이 없는 3.2km의 무장애 숲길이다.
마주치는 이 없던 산길과 달리 어린이부터 70대까지 전국 각지의 사투리가 들린다. 뜨거워진 심장과 근육이 은은한 주목 향기 속에 풀어지는 것만 같다. 고산 천연약수인 발왕수로 목을 축인다. 산행의 열기가 가라앉으며 몸도 마음도 차분해진다.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기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스카이워크를 구경한다. 최근 각 지자체마다 유행하는 투명한 유리 바닥을 설치한 고산 꼭대기 전망대인 스카이워크 끝에 서자 강릉에서 온 것만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부드러운 바람의 촉감과 물들어가는 낙엽의 향연, 온 몸이 즐겁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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