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
망자 이름 훔치기…진영논리로 패륜 무마 안돼[한기호의 정치박박]
대형참사 악용 정치, 가히 '비극포르노'
이태원 희생자 명단폭로 유족은 뒷전
"상주" 참칭, 삭제요청 거르는 친야매체
"수단불문 명단확보" 野논의 현실화
'尹 추락 저주' 종교인까지 사실상 한배
진영에 기댄 패륜…'미래'가 거부한다
한기호 기자
입력: 2022-11-18 15:12
친(親)더불어민주당 매체 '민들레'는 이태원 압사 참사 관련 희생자 155명 명단을 무단공개한 데 이어 18일 현재 "슬픔의 시간은 가라. 이제는 분노의 시간!"
이라는 글을 올려 윤석열 정부를 겨냥한 '분노' 선전에 나선 모습이다.<'민들레' 홈페이지 갈무리>
빈곤 친화(?)를 피력해온 더불어민주당의 최고위원이 영부인 자선행보에 던진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 같은 말이 정국을 휘젓는 사이,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예컨대 '비극 포르노' 정치부터 반성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빈곤을 과장·날조해서라도 후원금을 끌어모으려는 일부 자선단체를 겨누던 말을 빈곤의 '정치적 활용'이란 개념에까지 확장해 공공연히 쓸 수 있다면, 더 큰 틀에서 대형참사를 비롯한 '비극'을 정치적 호재인양 이용하는 행태로도 정치권을 겨눌 수 있을 것이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이태원 압사 참사'는 끔찍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참사 정치'는 더 끔찍하다. 사고 원인 내막을 알기도 전에 '대통령 경호 탓'부터 꺼낸다든지, '처벌' 대상부터 찾는다든지, 행정안전부 장관부터 파면해 대안없이 수습 컨트롤타워 붕괴를 유도한다든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고' '사망자' 표현에 호들갑을 떤다든지, '가해자' 설정을 원하는 듯 '피해자' 용어에 집착한다든지, 국가애도기간 지정은 "애도 강요"로 치부하더니 추모정국 주도권다툼 시동을 건다든지, 부지기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현실에 무척 충실해 보인다. 산 자들이 망자를 소품으로 무대를 꾸민다. 최악의 사례는 희생자 명단 무단공개다. 특정 정파가 입맛대로 망자(亡者)들을 소환하고, 이름을 사유화한 사건이다. 2개 친(親)민주당매체 민들레·더탐사가 지난 14일 이태원 사고 희생자 158명 중 155명의 이름을 담은 포스터와 기사를 올렸다. 수습당국이 사망자 신원은 모두 파악해뒀고 관련 수사로 보안대상인 개인정보를 유출시킨 셈이다. 곧이어 형사고발에 수사 대상이 된 행태다.
'이름 공개 자체가 잘못이냐'고 반문할 수는 있으나, '유족 동의 없이' 강행한 게 본질적 문제다. 민들레는 "유족들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깊이 양해를 구한다"고 했는데, 자백을 넘어 확신범에 가까운 태도다. "상주(喪主)"를 자칭하며 희생자 명단을 배포해놓고, 삭제를 원하는 유족에게 '알아서 연락하라'는 태도까지 보인다. 자신들도 묻지도 따지지 않은 '유족의 뜻'과 다르게 이름이 삭제되는 사례를 막겠다며 '홈페이지 회원가입' '신분증 사진 공개'를 요구하니 살라미 전술을 방불케 한다.
친(親)더불어민주당 인터넷 매체 '민들레'가 '더탐사'와 협업해 이태원 압사 참사 희생자 유족의 동의 없이 158명의 희생자 중 155명 이름을 공개한 기사에 달린 댓글들. 명단 무단공개를 지지한 네티즌 일부는 숨진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발해 논란을 불렀다. 유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매체의 결정에 동의한 적도
연락받은 적도 없다며 항의하는 모습이 보였다.<'민들레' 홈페이지 기사 및 댓글란 갈무리>
명단 공개에 이은 'n차 가해'도 이어진다. 민들레 기사에는 망자들에게 "고맙다" "그대들의 눈물이 민주주의가 됐다"는 희한한 댓글들이 달렸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결정된 2017년 3월10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 방명록을 쓴 당시 '대선 예비주자' 문재인 전 대통령만이 '특이 케이스'가 아니었다. '숨진 삼촌의 이름을 내려달라'는 댓글에는 "가장 우선시돼야 할 건 희생자, 그 다음이 유족"이라며 유족을 제끼면서까지 희생자 이름을 좌우하려는, 이름조차 없는 제3자의 반론이 달렸다.
이해하기 힘든 행태 이면엔 '정파성'이 자리잡고 있다. 시민언론이란 타이틀부터 무색하다. 더탐사는 열린공감TV에서 분화한 데다, 최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충돌한 김의겸 민주당 의원이 '협업' 관계를 인정하기도 한 매체다. 전쟁을 당연시하듯 민들레는 더탐사가 '게릴라전', 자신들은 '정규전' 담당이라고 공언하며 출범했다. 칼럼 필진으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문성근 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최배근 교수, 김민웅 촛불행동 대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등 민주당계 유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사태가 민주당에서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지난 7일 문진석 의원이 한 민주연구원 부원장으로부터 받은 텔레그램 메시지엔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체 희생자 명단·사진·프로필을 확보해 당 차원의 발표와 함께 추모 공간을 마련"하자는 주장이 담겼다. 발을 빼던 민주당에선 이재명 대표가 불과 9일 "이름과 영정을 당연히 공개하고 진지한 애도가 있어야 한다"고 띄웠다. '추모공간'은 민들레가 "위령비 건립 등 각종 추모사업"을 거론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변질된 세월호 피해지원사업의 재판(再版) 느낌이다.
정파적 분노조장엔 종교계까지 얽혔다. 지난 14일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소속이던 김규돈 신부는 윤석열 대통령 동남아 순방 계기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 마지않는다. 온 국민이 '추락을 위한 염원'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썼다가, 논란 직후 사제직이 박탈됐다. 천주교 대전교구 박주환 신부도 윤 대통령 부부가 비행 중인 전용기에서 떨어지는 이미지를 올리며 "비나이다", "기체 결함으로 인한 단순 사고였을 뿐 누구 탓도 아닙니다"라고 써 이태원 참사 정부 대응을 비꼬았다. 윤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도 동참했던 인사라고 한다.
'탈핵천주교연대 공동대표'라는 박홍표 신부는 "(나라가) 더 망하기 전에 누군가 십자가를 져야 했다"며 박주환 신부 옹호에 나섰다. 캄보디아 현지 심장병 환아를 만난 사진을 공개한 김건희 여사에게 "이 작자"가 "쓰레기짓"을 했다는 김디모데 기복교회복센터 소장도 덩달아 도마 위에 올랐다. 종교보단 주술 어울리겠다. 이들은 강경보수성향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로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가 갖는 신망을 앞세워 암약하는 이들이 '자유통일당 대표'로 드러내놓고 정당활동 중인 인물을 책망하는 건 물타기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 김영식 신부는 지난 14일 서울에서 이태원 참사 추모 미사를 열고 희생자 이름을 전부 부르는 호칭기도를 강행하며, "정부와 언론은 애도를 말하면서 오히려 시민들을 강제된 침묵 속으로 가둬두려고만 한다"고 정치공세를 폈다. 이튿날(15일) 김영식 신부는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 패륜이라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하겠다)"라고 했다. 유족 동의를 건너뛰고 망자들의 이름을 '분노의 땔감'처럼 쓰는 게 패륜행위의 본질이다.
지난 11월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 5번 출구 앞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진행한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검추진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에서
고민정(오른쪽 두번째) 최고위원이 참사로 숨진 배우 고 이지한씨의 어머니가 쓴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연합뉴스>
이태원 참사로 거대야당이 그려갈 그림은 이른바 '예견된 참사'보다 더욱 예견하기 쉬워 보인다. 민주당 강경파 의원 20명과 '위장탈당' 전력의 민형배 무소속 의원 등은 지난 15일 '10·29 참사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촉구 의원모임'을 발족하고 국회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같은 당 이해식 의원은 16일 국회 행정안전위 전체회의에 출석한 류미진 총경에게 이태원 참사 당일 서울경찰청 상황관리관임에도 112상황실을 비운 것을 "관례"라고 무마해주는 듯한 질의를 했다.
윤석열 정부가 인사(人事)한 경찰청장과 행안부 장관, 나아가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며 국정조사를 압박하는 것과 용산서·서울청 등 관할경찰의 책임을 묻는 기세가 크게 상반된다. 오죽하면 민주당의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요구서 제출에 동참한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관행적으로 현장에, 상황실에 안 간다면 당직일지를 도대체 왜 만드느냐"고 류 총경에게 따질 정도였다.
살아있는 잣대는 진영논리 뿐인 듯하다. 그러나 진영, 집단에 숨어든다고 저지른 패륜이 감춰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17일 공표된 윤 대통령 국정지지도가 29%에 머문다는 NBS(전국지표조사) 여론조사(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도 20%포인트나 높은 49%는 희생자 명단공개 주장을 '유가족의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불과하다'는 응답을 했다. 이런 응답성향은 미래세대로 불리는 20대와 30대 응답층에서 6할을 넘겼다.
한기호기자 hkh89@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