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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톡]"반도체 장비까지 밀리면 생존 불능"…'동병상련' 日 장비업계
3시간 전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 압박이 커지면서 주로 중국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던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중국 시장 비중도 급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주요 수출 시장으로 20% 이상 점유율을 차지하던 중국 시장과의 강제 분리는 뼈아프지만 미국의 핵심 기술 없이 장비생산 자체가 불가능한 일본 반도체 업계는 앞으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정책노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본 반도체 업계 내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미국의 눈치만 살펴서는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1980년대 미국의 압력으로 반도체 산업 황금기를 스스로 내려놔야 했던 굴욕적인 ‘미일 반도체 협정’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규제에 동참하더라도 일본 경제가 실속은 차릴 수 있도록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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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와 반도체 분야에선 악연있지만… 기술의존도 높아3일 니혼게이자이(니케이)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일본의 대중 반도체 장비수출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16% 감소했다. 당시 중국의 코로나19 봉쇄조치 여파를 감안해도 급격히 감소했다. 반대로 같은 기간 미국으로의 반도체 장비 수출 규모는 10% 이상 늘어났다.
일본 안팎에서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규제 압박에 따른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니케이는 "미·중 대립이 심해지면서 반도체는 공급망의 혼란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강하게 의식되게 되었다. 각 국·지역이 거액의 보조금 등을 사용해 자국에서의 반도체 생산을 늘리려고 하고 있어 구조적으로 대중 수출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과거 1980년대 미·일 반도체협정 당시처럼 미국에 의해 또다시 일본 반도체 업계가 끌려다니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1986년 미국 정부는 당시 일본의 전 세계 D램시장 점유율이 80%를 넘어서자 일본에 강력한 통상압박을 가하며 미국의 정책노선을 따라올 것을 강요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일본 반도체 업체에 생산 원가를 공개하고 자국 내 미국 반도체 업체의 시장점유율을 20%까지 올리도록 생산량 제한조건까지 걸었는데 이것이 1차 미·일 반도체협정이다. 이후 해당 협정이 잘 준수되지 않는다며 무역보복을 실시했으며 양국은 1996년에 2차 미·일 반도체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장기간 큰 정체기를 맞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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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7년 인텔은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의 자리를 되찾았고, 그 이후 현재까지 왕좌를 지키고 있다. 당시 인텔의 뒤를 이어 모토로라, TI 등 미국 기업들이 상위권에 올랐고 삼성전자도 그해 반도체 매출 7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안보 부문과 달리 반도체 분야에서만큼은 미국과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현재 일본 반도체 업계 입장에서 미국은 쉽게 저버리기 어려운 입장이다. 무엇보다 일본 반도체 장비 생산의 핵심 기술을 대부분 미국 기업들에 의존하고 있어 미국의 정책을 저버리고 대중수출 비중을 유지하면 아예 반도체 장비 생산에 어려움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의 기술 전수도 받기 어려워진다. 현재 일본 반도체 대기업 연합체인 라피더스는 IBM과 협약을 맺고 2나노 반도체 양산에 나서기로 한 상태다. 대중국 견제 움직임 속에 대만 TSMC 공장도 규슈지역에 설치되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공조체계를 깨트리는 것은 자칫 반도체 산업 성장을 막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마냥 버리기엔 너무 큰 中 시장그러나 일본 내에서도 마냥 미국의 편만 들고 거대한 중국 시장을 포기하긴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중국의 경기회복세가 뚜렷해지면 다시 반도체 업황이 크게 활기를 맞게 되고 이 경우 중국향 수출시장 매출이 급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반도체 장비 업계에서 중국은 최근까지도 전체 수출 비중의 20%가 넘는 거대한 시장이었다. 반도체 제조 장비 업체 도쿄 일렉트로닉의 2021년 매출액 중 중국 발 수출은 26%를 차지하기도 했다.
반도체 원판이 되는 실리콘웨이퍼를 생산하는 섬코(SUMCO)의 하시모토 마유키 회장은 "중국 스스로 반도체를 만드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중국이 (일본 웨이퍼를) 더 사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기대감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대중국 규제에 계속해서 동참한다는 것은 주요한 팔 하나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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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업체들은 일단 미국이 밝힌 대중국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비첨단 분야부터 공략하겠다는 입장이다. 니케이는 "전기차 등에 쓰는 반도체 수요는 왕성해 일본 대형 장치 업체들이 중국은 중요한 고객이기 때문에 계속 비즈니스를 확대할 것이라 입을 모으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결국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현명한 줄타기를 해야 살아남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재무성 관료를 지낸 다마키 유이치로 국민민주당 대표는 F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제조장치는 일본의 주요 수출품인데, 여기에 미국이 브레이크를 건다는 것은 큰 대미지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며 "반도체 세계 시장에서 밀려난 일본이 반도체 제조장비 점유율까지 내주게 되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경제산업성과 외무성이 적극적으로 외교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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