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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
오데사는 우크라이나 오데사주의 주도이다. 우크라이나의 제3의 도시이자, 우크라이나 남부 최대의 도시로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부산광역시, 중국으로 따지면 광저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어로는 'Оде́са [ɔˈd̪ɛsɐ]', 러시아어로는 'Оде́сса [ɐˈdʲes(ː)ə][5]'라고 하며, 일반적으로는 러시아어 명칭을 따른 영어 표기인 'Odessa'로 알려져 있다. 한국어 표기는 어느 쪽 언어를 따라도 오데사다.
잉어과의 열대어 중 하나인 오데사바브는 원산지가 오데사와 전혀 상관 없는 미얀마임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은 덕분에 전 세계에 커먼네임이 "오데사" 바브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역사[편집]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크림 칸국을 비롯한 흑해 북안 일대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후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던 것에 자극을 받은 예카테리나 2세가 1795년 건설했다. 흑해를 향해 열린 창으로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수출을 비롯해 각종 상업, 공업의 중심지이자 러시아 제국 해군 흑해함대의 기항지로 삼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도시 이름은 흑해안에 위치했던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인 오데소스[6](Ὀδησσός, 현 불가리아의 바르나)[7]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그리스 계획을 표방하여 러시아가 제3의 로마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흑해에 접한 지역에 만든 여러 새로운 도시 이름을 동로마 제국의 영토이기도 했던 그리스 식민도시 이름을 따왔거나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면 '반도'를 의미하는 '헤르소니소스(Χερσόνησος, Херсонисос)'에서 따온 헤르손[8], '덕망있는 도시'를 의미하는 '세바스투폴리스(Σεβαστούπολις, Севаступолис)'에서 따온 세바스토폴이 대표적이다.
흑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이자 러시아의 최대 항구였던 배경으로 인해 러시아 근대사에서 여러 중요한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헤르손에서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본격적인 불씨를 당겼다. 그 상징성으로 인해 러시아를 약화시키려는 나라들이 여러번 공격하기도 했다.
역사적 중요성, 특히 항구로서의 오데사가 가지는 중요성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동유럽 최대의 곡창인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에서 재배한 밀의 집산지이자 반출항이라는 점이다. 특히 19세기 들어 대영제국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낮은 영국의 식량 자급률이 더 낮아져 주요 식량인 밀을 수입하게 되면서 오데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함께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밀을 수송하는 주요 창구가 되었다. 이 덕분에 밀의 수출 중단은 러시아가 영국을 압박하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된 것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보더라도, 영국 의회에서 러시아를 비웃는 발언이 있었음이 알려지자 밀 수출을 중단해서 압박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9].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밀을 수입하게 되면서 의미가 많이 퇴색하게 된다. 참고로 조지아와 더불어 예전 공산권 세력에서 중요한 와인 생산지였고 현재도 양질의 스파클링 와인 등이 생산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러시아의 중요 도시라는 상징성 때문에 독일 국방군과 그 동맹국 중 하나인 루마니아군의 우선 목표가 되었는데, 소련군의 방어 의지 역시 결연해서 70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군은 패배하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당시 전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하던 소련군으로서는 드물게 선전한 전투였으며 그 희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자주 언급되었다.[10][11]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다시 복구된다.
여담이지만 러시아 제국시절부터 스탈린때까지 오데사는 소련에서 치안이 안 좋기로 소문난 도시였다. 비록 이 당시에 1차 세계대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대숙청, 2차 세계대전 등의 우여곡적이 있던 시절에도 오데사에 마피아 조직들이 설쳤기 때문이었다. 게오르기 주코프가 오데사로 발령나고 나서야 범죄자 색출작전에 나서서 범죄문제가 해결되었다.
현재에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독립과 함께 우크라이나 영토가 되었으며, 인구는 1,011,494명(2018년 기준)이다.
2001년의 주된 인구로는 우크라이나인 61.6% 러시아인 29%이다. 그 외에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라고 반드시 전부 반러인 것도 아니라서, 동부와 함께 친러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돈바스 전쟁 때는 오데사에서도 친러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정부에 맞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도네츠크나 루한스크와는 달리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위치라서인지[12] 금방 우크라이나군에게 제압당했다. 그 이후로 동부와 달리 우크라이나의 통치 아래에 조용히 있는 편이지만 여전히 친러 정당 지지율이 높게 나오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제한 같은 각종 반러 정책에 반발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이런 정서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특히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 및 병합, 돈바스 전쟁 등을 거치며 친러 성향은 점차 약해지고 반러 정서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 주민 구성도 2015년 국제 조사에 따르면 68%가 우크라이나인, 25%가 러시아인으로 나타나 우크라이나인이 증가하고 러시아인은 감소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오데사 시민들의 가정 내 언어 사용 비중에서 최근 우크라이나어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계기로 동부와 같이 반러 지역으로 변화하게 된다.
기후가 온화하고 흑해 해변 덕분에 크림 반도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피서지로 유명했으며, 크림 병합과 우크라이나 내전 이전까지는 러시아인 관광객들이 1년에 수백만명 단위로 방문하던 도시였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관계가 악화되고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내국인 전용 피서지로 전락한 상황이다. 러시아인 휴양 수요는 자국령이 된 크림 반도로 대신 몰렸기 때문.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를 못한다면 가기 좀 위험한 곳이기도 한데 북유럽 혹은 튀르키예 출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가 악명이 높았다.
우크라이나에서 고양이가 많은 지역이라 2019년에는 고양이 관련 관광 개발에 나섰다.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5:4로 나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는 러시아측이 오데사 상륙전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미사일로 오데사의 문화유산을 공격하면서 도시가 한때 친러에서 혐러로 완전히 뒤집혔고 결국 오데사 내 러시아 문화 청산 작업을 진행 중이다.# 크림 대교 붕괴 사건과 크림 대교 2차 붕괴 사건이 터지자 러시아가 보복으로 대규모 드론과 미사일로 공습을 가했는데 이 때문에 시도 때도 없는 공습에 큰 피해를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측도 반격으로 크림반도나 모스크바를 타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상호 보복전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