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유고슬라비아 ...[2024-05-08]

by viemysogno posted May 08, 2024 Views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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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세르보크로아트어: Jugoslavija / Југославија 유고슬라비야[*], 마케도니아어: Југославија 유고슬라비야, 슬로베니아어: Jugoslavija 유고슬라비야,[A]; '남슬라브족의 땅')는 1918년부터 1992년까지 존재했던 동남유럽과 중앙유럽의 옛 국가이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B],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옛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에 형성)이 세르비아 왕국에 합병되면서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성립되었으며, 주권 국가로서 남슬라브족의 최초의 연합을 구성하였다. 이 지역은 과거 몇 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였다. 페타르 1세는 첫번째 군주였다. 1922년 1월 13일 파리에서 열린 대사회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2] 1929년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의 침공을 받았다. 1943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를 성립하였다. 1944년 당시 망명 중이었던 페타르 2세는 이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였다. 이후 군주제는 1945년 11월에 폐지되었다. 공산정부가 수립된 1946년, 유고슬라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하였고, 이탈리아로부터 이스트라, 리예카, 자다르를 획득하였다. 파르티잔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통치하였다. 1963년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변경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는 6개의 구성국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1974년 이후 세르비아에는 다른 연방 구성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가진 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와 보이보디나 사회주의 자치주가 있었다.[3][4] 1980년대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와 민족주의의 부상 이후, 처음에는 공화국의 국경에 따라 5개국으로 분열되어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1993년부터 2017년까지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는 구유고슬라비아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을 전쟁범죄, 집단학살, 그리고 전쟁 중 벌어진 기타 범죄로 재판하였다.

 

해체 이후, 세르비아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공화국은 축소된 연방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성립했으며, 2003년부터 2006년까지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불렸다. 이 국가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법적 승계국 지위를 원했지만, 다른 이전 공화국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공유 승계[5]에 대한 비딘터 중재위원회의 의견을 수용하여, 2003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200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각각 독립국이 되면서 해체되었고, 2008년 코소보[a]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배경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유고슬라비아의 성립입니다.

6세기 경 남슬라브족이 발칸반도로 이주한 이래,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비롯한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한 이후로도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아 왔다.

 

13세기 무렵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간 문화의 교차점이었던 발칸반도에는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 작은 공국들이 형성됐으나, 역사적으로 주변국과의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기도 했다.

 

14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문명이 들어서자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이슬람교 등 3개 종교와 알바니아계, 그리스계, 터키계, 불가리아계, 세르비아ㆍ크로아티아계 등 5개 민족, 4개의 언어, 2개의 문자권이 혼재되면서 발칸반도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18세기 말 남슬라브족의 민족 해방 운동을 통해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 불가리아 공국 등이 단일 국가로 독립했으나, 마케도니아는 영토 확장을 위한 요충지로 잦은 침략을 받았다. 특히 1880년대부터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3국의 마케도니아 지배권 분쟁으로 인해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고, 마케도니아 영토는 그리스 왕국와 세르비아 왕국에 분할되었다.[6]

 

모든 남슬라브족을 위한 단일 국가로서의 유고슬라비아라는 개념은 17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19세기의 일리리아 운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은 'jug'(남쪽)와 'slaveni'(슬라브인)를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식인과 당시 망명 중이었던 세르비아 왕립 의회, 세르비아 왕가인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합작인 코르푸 선언의 결과였다.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18년,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과 세르비아 왕국이 통합하여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이 성립되었다.[7]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베르사유 국가'라고 불렸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입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바노비나 (1929년–1939년). 1939년 이후, 사바 바노비나와 연안 바노비나는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로 병합되었다.

1929년,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 정부는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하였다. 이로써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가 국명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 (유고슬라비아)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알렉산다르 1세 (유고슬라비아)입니다.

<nowiki /> 1월 6일 독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8년 6월 20일, 세르브인 의원 푸니샤 라치치는 국가의회에서 야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 의원 5명을 총으로 쏴 그자리에서 의원 2명이 사망하고, 지도자 스체판 라디치가 몇 주 후 사망하였다.[8] 1929년 1월 6일, 알렉산다르 1세는 헌법을 폐지하고, 정당을 금지하였으며 집행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국명을 유고슬라비아로 변경하였다.[9] 그는 분리주의 경향이 억제되고,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 완화되기를 희망하였다. 1931년, 알렉산다르 1세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독재를 포기하였다.[10] 하지만, 알렉산다르 1세의 정책은 이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절대적 통치자가 된 소련에서 비롯된 다른 유럽 열강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 세 정권 중 어느도 알렉산다르 1세가 추구한 정책을 선호하지 않았다. 사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체결된 국제 조약을 개정하기를 원했고, 소련은 유럽에서 지위를 되찾고 보다 적극적인 국제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는 중앙집권형 유고슬라비아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적 지역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지방과 바노비나에 새로운 내부 경계가 그려졌다. 바노비나는 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거나 투옥되었다. 알렉산다르 1세의 독재로, 비세르브인이 통일의 개념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는 영향을 불러왔다.[1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의 국기가 금지되었다. 또한, 공산주의 사상 또한 금지되었다.

 

1934년, 알렉산다르 1세는 프랑스를 공식 방문하던 도중 마르세유에서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에 의해 암살당했다. 블라도 체르노젬스키는 이반 미하일로프의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기구에서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혁명 기구인 우스타샤와 협력한 숙련된 사수였다. 알렉산다르 1세의 사망 이후, 11살이었던 아들 페타르 2세와 그의 사촌인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가 이끄는 섭정평의회가 그의 뒤를 이었다.

 

 

 

1934년–1941년

1930년대 후반의 국제 정치 정세는 주요 인물들 간의 편협한 태도, 전체주의 정권의 공격적인 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수립된 질서가 거점을 잃고 이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확신으로 특징지어졌다. 1939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지원과 압력으로, 크로아티아의 지도자 블라드코 마체크와 그의 당은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중요한 내부 자치정부가 있는 자치구)를 성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협정은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로 남아 있기를 명시했지만, 크로아티아는 서둘러 국제 관계에서 독립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왕국 전체가 연방화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로 인해 계획이 중단되었다.

 

1941년 3월 25일, 파울 왕자는 파시스트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고슬라비아가 전쟁에서 참여하지 않기를 바라며 빈에서 삼국 조약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파울의 섭정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저버렸다. 고위 군 장교들도 조약에 반대하여, 3월 27일 국왕이 돌아오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육군 장군 두샨 시모비치는 권력을 장악하여 빈 대표단을 체포하고, 폴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17살이었던 페타르 2세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면서 섭정을 끝냈다. 이후 1941년 4월 6일, 아돌프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곧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전에 격퇴당했던 그리스 침공이 뒤따랐다.[12][13]

 

 

 

제2차 세계 대전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유고슬라비아 전선입니다.

<nowiki />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및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시즘에 죽음을, 인민들에게 자유를!"을 외치는 파르티잔 스체판 필리포비치의 처형 직전

 

1941년 4월 6일 오전 5시 12분,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군대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였다.[14]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은 베오그라드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도시를 폭격하였다. 4월 17일, 독일군의 침공에 대한 11일 간의 저항을 끝내며,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역 대표들은 베오그라드에서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15] 30만 명 이상의 유고슬라비아 장교와 군인이 포로로 잡혔다.[16]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고 분할하였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1929년 성립된 파시스트 민병대인 우스타샤에 의해 통치되는 나치 독일의 위성국로 성립되었다. 하지만, 1941년까지는 활동이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독일군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와 슬로베니아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다른 지역은 불가리아, 헝가리, 이탈리아가 점령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권에 의해 50만여 명이 살해당했고, 25만여 명이 추방당했으며, 20만여 명은 가톨릭교로 강제로 개종당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집단학살)

 

애초,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은 공산주의 주도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왕당파 체트니크 두 파벌로 구성되었으며, 파르티잔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에게만 승인을 받았다. 범유고슬라비아 성향의 파르티잔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끌었으며, 극단적 친세르비아 성향의 체트니크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끌었다.

 

파르티잔은 점령된 서유럽과 중앙유럽에서 가장 큰 저항군으로 발전하게 된 게릴라전을 시작하였다. 체트니크는 처음에는 망명한 왕실 정부와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내 추축국보다 파르티잔과 싸우는데 집중하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체트니크 운동은 전적으로 추축국의 보급에 의존하는 협력주의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 민병대로 변모하였다.[17] 하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파르티잔은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점령군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승리는 네레트바 전투와 수체스카 전투였다.

 

1942년 11월 26일,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비하치에서 소집되었다. 1943년 11월 29일, 평의회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야이체에서 다시 소집되었으며, 전후 국가 조직의 기반을 마련하고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를 성립하였다. 이 날짜는 전쟁 이후 공화국의 날로서 기념되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추축국을 1944년 세르비아에서, 1945년 유고슬라비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축출할 수 있었다. 붉은 군대는 베오그라드 해방에 제한적인 지원을 제공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철수하였다. 1945년 5월, 파르티잔은 트리에스테와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의 일부를 점령한 후,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경 밖에서 연합군과 만났다. 하지만, 파르티잔은 같은 해 6월 다른 연합군과의 대립을 원하지 않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한 압력으로 인해 트리에스테에서 철수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옛 정부의 패권을 부정했던 파르티잔과, 국왕에게 충성하는 망명자들을 재결합시키려는 서방의 시도는 1944년 6월 티토-슈바시치 협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총리로 시작하여 독립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모스크바와 런던의 지원을 받았고, 80만여 명의 병력으로 가장 강력한 당파 세력을 이끌었다.[18][19]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내 희생자에 대한 전후 공식 추정치는 170만 4,000명이다.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와 보골류브 코초비치가 1980년대에 수집한 후속 데이터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 수는 100만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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