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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 찍소리 못한다…삼성도 을로 만든 반도체 ‘수퍼 갑’ ASML
TSMC·삼성 “먼저 달라” 애걸하는 ASML 파워
‘반도체 굴기’ 中, 대만 건드려도 ASML엔 침묵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입력 2022.02.16 09:12
이재용(왼쪽 두 번째)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0월 네덜란드 ASML 본사를 방문해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생산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맨 오른쪽은 피터 버닝크 ASML 최고경영자. /삼성전자
지난해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은 연매출 186억1100만 유로(약 25조2000억 원)를 기록했다. 2020년(139억7850만 유로) 대비 33.1% 늘었다. 순이익은 1년새 65.6% 증가한 58억8320만 유로(약 8조 원)에 달했다. 매출 대비 순이익률도 25.4%에서 31.6%로 높아졌다. 뺄 것 다 빼고 매출의 3분의 1을 순익으로 남긴 것이다.
날로 격해지는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ASML은 ‘수퍼 갑’으로 불린다. 보통 상황에선 장비를 주문하고 돈을 쓰는 쪽이 갑, 주문을 따내 만들어주는 쪽이 을이지만, ASML엔 이런 일반론이 통하지 않는다. 세계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1·2위인 대만 TSMC와 삼성전자가 돈보따리를 들고 찾아가도 이 회사가 전 세계에서 독점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원하는대로 살 수 없다. 올해 3나노미터(nm·1nm는 10억분의 1m) 반도체 양산을 앞둔 TSMC와 삼성전자의 승부는 초미세 공정에 필수인 이 EUV 노광 시스템을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가져갈 것인지에 따라 갈릴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미국의 견제 속에 반도체 자립에 사활을 건 중국에도 ASML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이 회사 기술과 장비를 손에 넣기 위해 국가 자존심도 접었다.
네덜란드 ASML. /ASML
◇ 초미세 공정 ‘EUV’ 장비 시장 독점
ASML은 세계 반도체 노광(lithography) 장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노광 장비는 실리콘 웨이퍼(둥근 원판)에 빛을 쏴 회로를 새겨주는 기계다. 회로 선폭이 좁고 가늘수록 칩 크기가 작아져 웨이퍼 한 개에서 더 많은 반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전력 소비량도 적어지고 성능은 높아진다. 신용 평가사 무디스 보고서(2020년 12월)에 따르면, ASML은 매출 기준 세계 노광 장비 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지배한다.
기술 수준에 따른 여러 종류의 노광 장비 중에서도 EUV 노광 시스템은 ASML 점유율이 100%다. 전 세계에서 ASML만 유일하게 EUV 노광 장비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EUV 노광 시스템은 7nm 이하 초미세 회로를 새기는 공정에 필수적인 기술이다. 이 장비가 없으면 대만 TSMC도, 삼성전자도 초미세 공정 반도체를 대량 생산할 수 없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초미세 공정 기술을 개발해도 이를 구현해 낼 EUV 장비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ASML이 한 해 생산 가능한 EUV 장비는 30~40대 수준에 불과하다. ASML은 9일 발표한 2021 연간 실적 보고서에서 2020년 31대, 2021년 42대의 EUV 장비를 고객사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3nm 양산 경쟁에 돌입한 TSMC와 삼성전자가 물량 대부분을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EUV 장비 대당 가격은 1억4000만 달러(약 1700억 원) 수준인데, 아무리 높은 값을 불러도 손에 넣기 어려운 실정이다.
광학 렌즈를 통해 보여지는 실리콘 웨이퍼(둥근 원판). /ASML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20년 10월 ASML의 네덜란드 본사를 찾아가 피터 버닝크 ASML 최고경영자에게 EUV 장비 공급을 직접 요청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EUV에 최적화된 첨단 반도체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초기부터 ASML과 협력했다”고 했다.
EUV 장비 한 대에는 부품 수십만 개가 들어간다. ASML은 “일부 제품은 700개 이상 공급사가 만드는 30만 개 이상 부품으로 구성된다”며, 제품 개발이 그만큼 복잡하다고 설명했다. 이른 시일 안에 EUV를 양산할 수 있는 회사가 또 나오기 어려운 이유다. 한 회사가 ASML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려면 10년 이상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컨설팅사 베인앤코의 반도체 애널리스트 피터 한베리는 미 CNBC와의 인터뷰에서 “ASML은 반도체 생태계 전체에서 절대적 위치에 있다”며 “한동안 5nm 이하 칩은 ASML 장비로만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ASML의 EUV 노광장비. /ASML
◇ ‘나노 전쟁’ TSMC·삼성전자, EUV 확보 사활
ASML의 국가별 매출 비중은 어느 국가가 반도체 설비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ASML은 지난해 역대 최대 연매출을 올린 이유로 전 세계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 디지털 인프라 구축 가속화와 함께 각국의 기술 주권 강화를 꼽았다. 각국 정부가 반도체 공급 확보를 국가적 과제로 추진하면서 반도체 산업 투자가 늘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ASML에서 가장 많은 장비를 사들인 회사의 국적은 대만·한국·중국·미국 순이다. 대만·한국 비중이 각 3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대만 매출이 73억2790만 유로(39.4%)로 늘며, 비중이 40%에 육박했다. 그 다음이 한국(62억2300만 유로)이었다. 한국 매출 비중은 2020년 29.7%에서 2021년 33.4%로 높아졌다. 중국(27억4080만 유로, 14.7%), 미국(15억8320만 유로, 9%)이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5월 18일 중국 산시성 시안의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코로나 영향과 대책을 점검했다. /삼성전자
ASML은 “2020년엔 고객사 세 곳이 전체 매출의 71.2%를 차지했고, 2021년엔 2개 고객사가 전체 매출의 67.2%(125억540만 유로)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ASML이 대만 TSMC와 삼성전자로부터 전체 매출의 3분의 2 이상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ASML은 “대만과 한국이 전 세계 수요를 맞추기 위해 생산능력을 확장하면서 지역별 매출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고 했다.
지난해 중국이 2년 연속 미국을 제치고 ASML 매출 3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중국 시장 매출은 27억4080만 유로로, 2020년(23억2440만 유로) 대비 18% 증가했다. 미국은 2019년(19억8020만 유로)만 해도 ASML에 세 번째로 큰 시장이었으나, 2020년 16억5700만 유로, 2021년 15억8320만 유로로 매출이 계속 줄었다. 미국보다 중국이 장비 구입에 더 많은 돈을 썼다는 얘기다.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SMIC 로고. /SMIC
◇ 中도 ASML 장비 도입 필사적
중국은 현재 ASML로부터 가장 앞선 노광 기술인 EUV 장비를 살 수 없다. 미국 정부가 중국 기업에 반도체 기술·장비를 판매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정부는 2019년 9월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 제조사인 SMIC를 거래 제한 기업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렸다. 미국 기업과 미국 기술을 사용하는 외국 기업은 미국 정부의 사전 허가 없이는 SMIC에 반도체 기술과 장비·부품을 수출할 수 없다. 중국이 최첨단 반도체 기술을 군사력 강화에 이용해 미국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에서다. SMIC의 첨단 반도체 기술·장비 접근을 원천적으로 막는 조치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제재로 ASML도 SMIC에 EUV 장비를 팔 수 없다. 네덜란드 정부는 트럼프 정부 압박으로 2019년 6월 만료된 중국 수출 허가를 갱신해주지 않았다. 조 바이든 정부 들어서도 중국 수출 승인은 여전히 보류 상태다. ASML은 “중국 등 특정 국가로의 장비 수출은 라이선스와 허가 획득 여부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특히 미국 정부는 특정 중국 기업을 상대로 무역 제재, 수출 통제 등 조치를 시행 중”이라며 “무역·수출 장벽이 특정 고객에게 우리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능력을 제한한다”고 했다.
바이든 정부는 SK하이닉스가 중국 장쑤성 우시 D램 공장에 ASML의 EUV 장비를 배치하려는 계획에도 제동을 걸었다. 중국으로 장비와 기술이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2월 ASML에서 2025년까지 EUV 장비 약 20대를 수입하는 계약을 맺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4월 12일 백악관에서 반도체·자동차·테크 기업 경영진과 화상 회의를 하며 반도체 핵심 소재
실리콘 웨이퍼(둥근 원판)를 손에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중국은 첨단 장비 도입에 필사적이다. 현재 중국이 모든 노광 장비를 수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DUV(심자외선) 등 EUV보다 기술 수준이 낮은 구형 장비는 수입이 가능한 상황이다. 미국 제재 시행 후인 지난해 2월 ASML과 SMIC는 반도체 장비 공급 계약을 2021년 말까지로 1년 연장했다. SMIC는 10nm 이하 공정을 위한 장비는 수입할 수 없지만 14nm 이상 장비는 수입할 수 있다. SMIC는 “2025년 노광 장비 전체 판매 중 3분의 2가 EUV일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는 2018년 예측치보다 낮은 수치”라며 “EUV 시장이 줄어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여전히 업계 주류인 DUV 등 구형 장비 시장이 예상보다 더 크게 성장 중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이 EUV를 못 구하는 대신 그 아래 급의 장비 확보에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ASML이 최대 고객인 대만을 ‘국가’ 대접해주는 것에도 눈을 감았다. ASML은 지난해 연간 실적 보고서의 여러 군데서 대만을 국가로 지칭했다. 한 예로, ASML은 “우리가 영업 활동을 하는 모든 국가에서 소득세 신고를 하며, 네덜란드·미국·대만·한국·중국이 주요 신고국”이라고 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대만을 중국의 일부라 주장한다. 중국이 국가 주권과 영토 문제에서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대만이다.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엔 보복을 서슴지 않는다. 최근 중국이 동유럽 리투아니아에 경제 보복을 가한 것도 리투아니아가 수도 빌뉴스에 대사관 격인 대만 대표처 설립을 허용하며 대만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대만 TSMC 로고. /로이터 뉴스1
대만 주권 문제엔 이렇게 강경한 중국이 ASML에게만은 관대한 것은 반도체 생산을 위해 그만큼 이 회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ASML은 “중국은 대만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대만 정부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대만과 중국 간 관계 변화, 대만 정부 정책, 대만의 정치·경제·사회 환경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인들이 우리 사업에 실질적인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ASML은 둥팡징위안이란 중국 반도체 회사가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제품을 팔고 있다고 이번 실적 보고서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이 회사는 중국 정부가 반도체 자립을 위해 지정한 강소 기업 중 하나다.
지난해 전 세계에선 1조1000억 개 이상 반도체가 생산됐다.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20년 4400억 달러에서 2021년 5900억 달러로 커졌다. 2025년엔 반도체 시장이 7000억 달러로 더 성장할 것이란 게 ASML의 예측이다.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조선비즈 베이징 특파원 김남희 기자입니다. 알면 좋을 중국 뉴스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