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S 지식정보센터

레퍼런스

 

 

 

 

중앙일보

전두환 비사

 

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카드 발행 일시 2024.03.05

에디터 오병상

 

 

 

‘전두환 비사’ 연재를 시작하며

 

‘전두환 비사’는 중앙일보가 1990년 11월부터 1995년 4월까지 연재했던 기획취재 ‘청와대 비서실’ 시리즈를 현시점에 맞게 재구성한 기획입니다. ‘청와대 비서실’은 과거 3명의 군부 출신 대통령(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기 권력 비사를 두루 발굴취재했는데, ‘전두환 비사’는 가장 뜨거운 논란의 대상인 전두환의 등장과 몰락을 집중 탐구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 해제 등으로 드러난 미국의 역할과 한계 등은 새로 추가했습니다. 현대사를 정확히 기록한다는 취지에서 팩트 중심의 객관적 글쓰기를 원칙으로 삼으면서도,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썼습니다.

 

 

 

<제1부> 궁정동의 총소리

 

1회. 누가 박정희를 죽였나

 

 탕, 탕.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40분 청와대 정문 앞 궁정동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였다. 박정희 철권통치 18년의 마감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화의 출발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79년 10·26 직후 궁정동 안가 만찬장 모습. 십장생 병풍 앞 등받이가 박정희 대통령 자리. 맞은 편 방석 왼쪽이 김재규 정보부장, 오른쪽이 김계원 비서실장 자리. 왼쪽 끝 술병이 놓인 곳이 차지철 자리. 술상 오른쪽 핏자국이 남아 있다. 중앙포토

1979년 10·26 직후 궁정동 안가 만찬장 모습. 십장생 병풍 앞 등받이가 박정희 대통령 자리. 맞은 편 방석 왼쪽이 김재규 정보부장, 오른쪽이 김계원 비서실장 자리. 왼쪽 끝 술병이 놓인 곳이 차지철 자리. 술상 오른쪽 핏자국이 남아 있다. 중앙포토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과 이에 따른 혼돈 상황에서 섣불리 서울의 봄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군부, 흔히 말하는 ‘신군부’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군부의 리더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아들로 통했다. 10·26은 12·12와 5·18로 이어지는 비극의 신호탄이었다.

 

누가 박정희를 죽였나?

사건 장소는 궁정동 안가(안전가옥)다. 지금은 분수대 옆 무궁화동산 자리.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가 관리하는 비밀 장소다. 술을 좋아하는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들과 저녁 술판을 벌이는 곳이다. 술자리 정규 멤버는 박정희 외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좌우에 두 명의 여성이 추가된다. 그때마다 달라야 했다. 이 날의 경우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었다. 사건 직전 심수봉은 ‘그때 그 사람’을 불렀다.

 

범인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다. 김재규는 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차지철 경호실장을 먼저 쏘아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혔다. 이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뭐하는 짓이야”라고 소리 지르자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쐈다. 폐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은 박정희는 술상 위에 고꾸라졌다. 심수봉이 부축하며 “각하 괜찮으십니까”라고 묻자 “난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김재규는 권총이 격발 불량으로 고장나자 바깥으로 나가 부하에게 다른 권총을 받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새 화장실로 도망쳤던 차지철이 방 밖으로 도망치려 나오다가 김재규와 마주쳤다. 차지철은 항상 권총을 차고 다녔다. 궁정동 술자리에도 권총을 차고 왔지만 얼마전부터 총을 두고 왔다. 차지철은 사방 탁자를 들고 맞서다가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차지철은 이후 김재규 부하의 확인사살을 받고 절명했다.

 

김재규는 피를 쏟으면서도 의식이 남아 있던 박정희의 뒷머리를 근접 겨냥해 확인사살했다. 이 때 김재규의 흰색 셔츠에 피가 튀었다. 박정희 시신이 경복궁 옆 국군서울지구병원(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군의관이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머리의 총상 때문이었다.

 

1979년 10·26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암살범 김재규 정보부장이 현장검증에서 앞쪽 박정희(대역)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 왼쪽은 김계원.

1979년 10·26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암살범 김재규 정보부장이 현장검증에서 앞쪽 박정희(대역)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 왼쪽은 김계원.

 

김재규의 사전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대기 중이던 경호실 직원들을 모두 사살했다. 그 와중에 네 발의 총탄을 맞고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호원 박상범은 이후 김영삼 정부 경호실장이 됐다.

 

“형님, 저는 한다면 합니다.”

와중에 김계원 비서실장은 무사했다. 김계원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다음 불발 권총을 바꾸러 나가자 복도로 나가 벽을 붙잡고 떨고 있었다. 확인사살까지 마치고 방을 나온 김재규는 복도의 김계원에게 “형님, 저는 한다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을 같은 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거사 계획을 미리 말했다. 김재규는 이날 오후 5시40분쯤 안가에 도착한 김계원과 함께 대통령을 기다리면서 당시 정국의 핫 이슈였던 ‘부마사태’(부산·마산 지역 민주화 시위) 얘기를 나눴다.

현장을 직접 보고 온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민란”이라고 말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일부 불순분자 소행”이라는 식으로 거짓보고하면서 강경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서 문제라는 주장이었다. 김계원이 “차지철이 문제”라며 동의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형님, 그 자식 해치워버릴까요”라고 되물었다. 김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런 얘기를 나눌 정도로 가까웠다. 나이 한 살 차이인 둘은 경북 선산(김재규)과 영주(김계원) 출신으로 사실상 동향이나 마찬가지다. 식민지 시절 일본군에 몸담고 있다가 해방 직후 한국군에 입문해 출세가도를 동반질주했다. 특히 1960년께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 시절 경남 마산에서 회식을 마치고 귀대하던 중 지프가 낭떠러지로 추락해 중상을 입었는데, 당시 육군대학 총장이던 김계원이 업고 올라와 후송한 덕분에 살았다. 이후 김재규는 김계원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깍듯하게 모셨다.

 

대만 대사를 마치고 귀국한 김계원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추천한 것도 김재규다. 그래서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거사를 미리 알리고 지원군으로 삼았다. 김재규는 거사를 마치고 궁정동을 떠나면서 김계원에게 “보안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현장 수습하는 뒤처리를 맡겼다.

 

이후 김계원은 실제로 김재규가 요구한 보안을 지키고자 했다. 박정희의 시신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겨 대통령 전용 병실에 안치하면서도 주검의 주인이  ‘대통령’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이에 더해 궁정동 안가에서부터 동행한 중앙정보부 직원 두 명을 병원에 남겨두고 외부인 접촉을 막게 했다. 또 청와대로 복귀한 김계원은 경호실 직원에게 비상근무령을 내리면서도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출동 금지”를 지시했다. 비상사태라면서 상황 설명도 하지 않고, 대신 경호실의 손발을 묶어 놓은 셈이다.

 

김계원은 총리와 장관들에게 비상사태 논의를 위해 청와대로 모여 달라고 연락했다. 최규하 총리가 청와대에 도착하자 김계원은 ‘대통령 유고’ 상황이라고 밝히면서 “김재규가 차지철과 싸우다가 잘못 쏜 총에 각하가 맞아”라는 애매모호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최규하를 포함한 장관과 경호실 관계자까지 어느 누구도 김계원을 추궁하지 않았다.

 

밤 9시쯤 김계원은 용산 육군본부 지하벙커로 간 김재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재규가 “총리와 국무위원을 데리고 이쪽으로 오라”고 연락하자 각료들을 몰고 육본 벙커로 갔다. 김재규는 최규하 총리에게 “대통령 유고다.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을 선포해 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가 자세한 상황설명을 요구했지만 김재규는 “보안을 지켜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밤 11쯤 최규하 총리와 각료들은 긴급 국무회의를 열기 위해 육본 옆 국방부 대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총리는 김재규에게 “직접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김재규는 횡설수설했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유고에 따른 비상계엄을 주장하면서 “유고 사실 자체를 공개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깐깐한 신현확 부총리가 “정확한 사정을 알아야 국무회의 의결을 할 수 있고, 국민도 설득할 수 있다”며 추궁했다. 다른 장관들이 신현확에게 동조했다. 정회가 선포됐다.

 

김재규의 얼렁뚱땅 밀어붙이기가 벽에 부닥친 셈이다. 김계원은 이를 지켜봤다. 김재규의 거사를 지원하는 세력은 전혀 없음을 확인한 셈이다.

 

김계원의 변심 “김재규가 시해범” 

김계원의 마음이 바뀌었다. 밤 11시40분, 김계원이 슬그머니 회의실을 빠져나와 옆 국방장관 보좌관실로 들어갔다. 보좌관에게 부탁해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참모총장을 조용히 불러오게 했다.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라고 털어놓은 다음 “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은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승화 총장은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다. 김재규는 이날 오후 4시 차지철로부터 ‘궁정동 행사 6시’를 통보받자마자 정승화 총장에게 전화해 “궁정동에서 저녁 같이하면서 시국 얘기를 나누자”고 말했다.

 

김재규는 대통령을 암살하는 현장에 정승화를 끌어들인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계엄이 선포될 경우 계엄사령관이 되기에, 차후 권력 장악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김재규는 정승화를 자기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차기 참모총장으로 정승화를 적극 추천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궁정동 안가엔 독립된 건물 3개 동이 있다.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대통령 술자리에 참석해야 하게 됐다”며, 옆 건물 식당에서 정보부 국내정치담당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먹으며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김재규는 대통령과 술을 마시다 중간에 나와 정승화가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술자리로 돌아가 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곧바로 본관으로 돌아와 정승화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궁정동을 떠났다.

 

정승화는 차 안에서 김재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대통령 술자리에 참석 중이라던 김재규가 피 묻은 셔츠 바람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허겁지겁 달려왔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재규는 “큰일났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운전사에게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가자”고 지시했다.

 

정승화가 “각하께 무슨 일 있냐”고 묻자 김재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당했다”는 표현을 했지만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그래서 정승화는 대통령의 유고는 확인했지만 범인은 알 수 없었다.

 

정승화는 혹시 모를 상황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려면 “남산보다 육본이 낫다”고 주장해 차를 용산(육본)으로 돌렸다. 육본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는 먼저 주요 군부대 상황을 점검했다. 그리고 전성각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전화해 “청와대를 외곽에서 포위하라”고 지시했다. 경호실에서 병력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은 것이다.

 

당시와 관련해 정승화가 남긴 진술은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난다. 10·26 직후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자리에 있을 당시 진술, 12·12로 신군부에 연행된 이후 진술, 그리고 1987년 김영삼(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가 고문으로 영입한 이후 정치인이 된 정승화의 발언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보도한 중앙일보 지면(1979년 10월 27일자 1면). 주한미군 비상, 전국에 비상계엄 등 당시 급박했던 상황에 대한 소식도 함께 실렸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보도한 중앙일보 지면(1979년 10월 27일자 1면). 주한미군 비상, 전국에 비상계엄 등 당시 급박했던 상황에 대한 소식도 함께 실렸다. 중앙포토

 

분명한 것은 정승화가 궁정동 현장에 있었고, 김재규와 같은 차량에 탑승해 육본으로 이동했으며, 육본 도착 이후에도 김재규와 계엄 발령 이후 문제를 협의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이후 신군부의 12·12 쿠데타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10월 26일 자정이 돼서야 비로소 박정희를 죽인 범인이 김재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제 전두환이 나설 차례다.

 

 

 

 등장인물

 

◆김계원=1923년 경북 영주 출신. 일제시대 학도병에 징집돼 일본군으로 복무.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 대만 대사. 1978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10·26 현장에 참석. 1980년 군사법정에서 김재규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 1982년 석방. 1988년 사면복권. 2016년 사망.

 

◆김재규=1924년 경북 선산 출신. 육사 2기. 1973년 육군 중장 예편. 건설부 장관·국회의원 역임. 1976년 중앙정보부장 취임. 1979년 10·26 사건의 주범으로 박정희와 차지철 암살. 1980년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

 

◆노재현=1926년 경남 마산 출신. 육사 3기. 1972년 육군참모총장. 1977년 국방부 장관, 1979년 12·12 당시 잠적했다가 뒤늦게 나타나 신군부를 지지. 이틀 후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한국비료공업협회장 등 역임. 2019년 사망.

 

◆박정희=1917년 경북 구미 출신. 대구사범 졸업 후 교직에 있다가 1940년 만주국 육사를 지원. 일본육사 편입 졸업 후 만주군 장교로 근무. 해방 후 육사 2기로 입대. 1961년 5·16으로 집권. 1979년 10·26으로 암살당할 때까지 18년간 집권.

 

◆신현확=1920년 경북 칠곡 출신. 일제하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제국정부 공무원으로 근무. 해방 후 상공부 관료로 장관까지 지내고 1973년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정계 진출. 경제부총리와 국무총리 역임. 2007년 사망.

 

◆전두환=1931년 경남 합천 출신. 육사 11기. 육사 출신 사조직 하나회 리더. 1961년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비서관.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 취임. 10·26 사건 수사를 총지휘한 합동수사본부장. 12·12로 군권을 장악하고 1980년 대통령 취임.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따라 군사반란·내란죄로 기소돼 사형 선고. 1997년 사면. 2021년 사망.

 

◆차지철=1934년 경기도 이천 출신. 1954년 육군 갑종장교 간부후보생으로 소위 임관. 5·16에 가담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부관. 중령 전역 후 공화당 국회의원. 1974년 경호실장 취임. 1979년 10·26 당시 김재규에게 암살당함.

 

◆최규하=1919년 강원도 원주 출신. 일제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만주국 공무원으로 근무. 해방 후 외무부·농림부 근무. 1979년 10·26 당시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거쳐 제10대 대통령 취임. 1980년 8월 신군부 압력으로 대통령직 사임. 2006년 사망.

 

◆정승화=1929년 충북 영동 출신. 육사 5기. 10·26 당시 육군참모총장. 12·12로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군사법정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유죄 선고받고 복역 중 1년 만에 사면복권. 1987년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입당. 대한성우회 회장. 2002년 사망.

 

 

전두환 비사

현재글 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 ‘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전두환 “군인은 멸사돌진” 김재규 체포 때도 그랬다

 

 

에디터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oh.byungsang@joongang.co.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IIS Opinion] Chay Bowes는 서구 정치의 핵심 문제를 잘 파악했습니다. 서구 정치에서 평화는 돈이 안 되고, 전쟁을 하면 정치인들이 돈을 벌게 되는 것이 핵심 문제입니다 [2024-04-09] viemysogno 2024.04.09
264 (유튜브 머니플로우 MoneyFlow) 프롬프트사용법: 가장 완벽한 GPT 프롬프트 만드는법 ...[2024-04-06] viemysogno 2024.04.06
263 Lenovo (레노버) [2024-04-06] viemysogno 2024.04.06
262 =추천= (유튜브 박상후의 문명개화) 이란의 대이스라엘, 대미전략!/점진적이며 체계적인 개구리 삶기! ...[2024-04-06] viemysogno 2024.04.06
» (중앙일보 오병상) 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2024-03-30] viemysogno 2024.03.30
260 =추천= (유튜브 강호의발바닥TV) 카페 초대형화 추세 | 어중간하게 시작했다가는 싹다 폐업한다 ...[2024-03-29] viemysogno 2024.03.29
259 =특급= (유튜브 SCOTT 인간과 자유) Diddy 수사, 대어가 낚였다/ K-POP 배후 글로벌리스트/ 러, 테러 배후로 우크라 지목 ...[2024-03-29] viemysogno 2024.03.29
258 (유튜브 박상후의 문명개화) 유고폭격부터 우크라이나 분쟁까지!/냉전이후 시작된 미국의 예외주의!/러, 미 외교비사 대공개! ...[2024-03-26] viemysogno 2024.03.26
257 (시사상식사전) 수익률곡선 제어정책 YCC ...[2024-03-25] file viemysogno 2024.03.25
256 (나무위키) 오데사 ...[2024-03-22] viemysogno 2024.03.22
255 (유튜브 박상후의 문명개화) 작동되지 않는 일방제재!/이란의 인프라 혁명, 수혜자는 중국! ...[2024-03-21] viemysogno 2024.03.21
254 (유튜브 세상돌아보기Gust&Thunder) 민주주의 정상회의. 왜 이 시점에 한국에서 열릴까? ...[2024-03-21] viemysogno 2024.03.21
253 =추천= (유튜브 언더스탠딩 : 세상의 모든 지식) [하이라이트] 대학병원이 죽어야 한국 의료가 삽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박종훈 교수) ...[2024-03-19] viemysogno 2024.03.19
252 =(Hot)= (유튜브 박상후의 문명개화) "내가 안되면 피바다 닥쳐올 것"/"트럼프가 CIA 동원, 반중 선전전 벌여" ...[2024-03-19] viemysogno 2024.03.19
251 (유튜브 지식 브런치) 우크라이나는 왜 피할 수도 있는 전쟁에 뛰어들었나.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돌아보기 ...[2024-03-11] viemysogno 2024.03.11
250 =추천= (유튜브 SCOTT 인간과 자유) 시한폭탄 48개국 부도 위기/ BRICS로 탈출, 미국의 대응/ 금융 위기를 부를까? ...[2024-03-10] file viemysogno 2024.03.10
249 =Hot= (유튜브 박상후의 문명개화) 시진핑이 중국경제를 파괴하는가! ...[2024-02-27] file viemysogno 2024.02.27
248 =추천= (유튜브 클래식톡 Classictalk) 세계적 소프라노 박혜상, 인터뷰 도중에 눈물 보인 사연 | 노매드라이프, 마스크 멈춰, 시골에서 득음 @클톡인터뷰 ...[2024-02-24] file viemysogno 2024.02.24
247 (나무위키) 민형배 의원의 위장탈당 사건 ...[2024-02-15] viemysogno 2024.02.15
246 [편집] - (유튜브 SCOTT 인간과 자유) 우크라, 중동 전황/ 대만 전쟁時 한국 자동 개입?/ 한국인 골수에 박힌 제3세계 비하 ...[2024-02-14] file viemysogno 2024.02.14
245 (유튜브 NTD Korea) 로버트 말론 “누군가 당신의 인지 능력을 조종하고 있다면” [폴아웃] ...[2024-02-12] viemysogno 2024.02.1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6 Nex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