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무슨 말인지 솔직히 전혀 모릅니다.
세계 현대사에 대해 필자가 너무 무지한 듯 ...
지난 수 십년간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체를 일단 잘 모르니... ㅜㅜ
필자는 공부 좀 해야 할 듯 ㅜㅜ
정말 한 마디도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네요... ㅜㅜ ...
...... [2023-12-04] IIS 지식정보네트워크.
키신저의 사망과 미 헤게모니의 종말!/모래성과 같았던 키신저의 유산!
박상후의 문명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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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2. 4.
이번 방송에서는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헨리 키신저에 대한 러시아의 평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키신저는 지난세기 세계질서를 만든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나라마다 그의 대한 평가는 다양한데 러시아에서는 그의 죽음에 애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견해가 주류입니다.
전세계를 누비며 주요세력의 지도자와 만나고 주요포럼에서 연설했던 키신저는 그의 후계자들이 망치고 있는 것들을 구해내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러시아매체 차르그라드는 분석했습니다. 그러면서 키신저는 속이는데 능숙한 교활하고 일관적으로 지능적인 러시아의 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또 그는 노년에 모스크바와 베이징과 관련해 자신이 수립한 노선이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고 이 매체는 말했습니다. 과거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았는데 지금 나타난 결과는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을 적대시함으로서 자신이 짜놓은 세계질서가 엉망이 됐다는 것입니다. 차르그라드는 소련의 잘못된 노선을 걷어낸 러시아는 살아남아 다시 거듭나고 있으며 서방과 단절하고 영토완정을 회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러시아와 대립하지 않으면서 믿을 수 없을 만치 강해졌고 모스크바를 동맹국삼아 세계패권을 위한 투쟁에서 미국에 도전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미국의 영향력과 역할이 심각하게 축소되는 동시에 서구의 글로벌리즘이 팽창을 멈추고 단순한 서구블록으로 축소됐다면서 새로운 세계의 중재자는 유라시아와 러시아가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차르그라드는 2014년 러시아의 봄이 혹독했던 것은 키신저의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키신저도 러시아를 여러차례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10차례 이상 만났는데 2001년 7월이 처음이고 마지막 만남은 2017년 6월 29일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소련을 죽인 키신저는 러시아에서 외교아카데미와 여러 대학에서 명예칭호도 받았고 2016년에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차르그라드는 록펠러 재단과 글로벌리즘의 기반인 외교협회 CFR회원이었던 키신저가 소련해체를 목표로한 데탕트 정책으로 레오니드 브레즈녜프을 속였다고 말했습니다. 환상적이고 해로운 것으로 판명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댓가로 미국의 달 사기에 눈을 돌리도록 소련지도부를 유혹하는 것은 키신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미 매체는 말했습니다. 러시아는 미국의 달착륙을 사기극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련의 묘비명이 됐던 1975년 헬싱키 법안도 키신저가 참여했으며 중앙아시아 분리를 목표로 하는 소련 남부 국경에 불안정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다 그의 소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키신저가 1970년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도 개입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키신저는 1973년에서 75년까지 미국역사상 유일하게 NSC 수장과 국무장관을 겸임함으로서 리처드 닉스이나 제럴드 포드보다 더 영향력이 컸다고도 평가했습니다. 키신저는 백악관을 떠난 뒤에도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에게 미하일 고르바쵸프를 속이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키신저의 노년은 개인적인 비극이었다고 차르그라드는 평가했습니다. 미국 헤게모니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가 구축한 세계질서는 토니 블링컨 같은 형편없는 키진저의 아류로 인해 여기저기서 이음새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차르그라드는 중국만큼은 키신저에 대해 극진했다고 말했습니다. 2023년 7월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는 시진핑을 포함한 중국 고위층 전체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중국은 키신저를 라오펑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차르그라드는 키신저가 도널드 트럼프와와 조 바이든에 반대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중국에 있어 키신저는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키신저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강성한 중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차르그라드는 키신저가 정말 교활하게 행동했다면서 이는 러우문제에서도 나타난다고 설명했습니다. 2014년 미국과 동맹국들이 크림편입과 관련해 현상을 동결하고 차후 전쟁을 더 잘 준비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더니 2016년에 별안간 미국은 모스크바를 위협이 아닌 균형을 위한 세계의 핵심요소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16년은 키신저가 러시아 외교아카데미 회원이 된 해입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푸틴 대통령을 만나 요사를 떨었습니다.
키신저는 뒤늦게 러시아와 미국의 균형은 세계의 안정을 강화할 것이고 워싱턴은 벨로루시에서 카자흐스탄까지 구 소련공화국에서 러시아의 헤게모니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우크라이나가 중립으로 남아야 하고 서방이 키예프에 양보를 하더라도 평화협상을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사화에 연막탄을 쳤던 키신저는 뒤늦게 키예프를 나토에 가입시킬 것처럼 한 행동은 서방의 실수였으며 나토의 확장은 폴란드에서 멈췄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러시아를 달콤한 말로 속이는게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자 키신저가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러시아는 키신저가 뒤늦게 자신의 오류를 깨닫기는 했지만 평생동안 러시아에 해를 끼친 인물이라면서 그의 사망을 두고 애도를 표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차르그라드는 결론지었습니다. 또 2017년 89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난 그의 동료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경우처럼 안도감을 느낀다고도 했습니다.
차르그라드는 키신저와 대비되는 사례로 봉쇄정책의 입안자 조지 케넌을 들었습니다. 2005년 105세의 나이로 타계한 조지 케넌은 냉전의 설계자지만 우크라이나만큼은 러시아의 레드라인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조지 케넌이 러시아를 적대시하긴 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정직한 외교관이라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키신저는 생애 마지막 날까지 글로벌리즘 집단에 남아 있었고 러시아와 세계에 많은 해악을 끼쳤다고 차르그라드는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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