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비즈
유통
식품
“희귀 위스키 싹쓸이”... ‘남던’에 중국인이 돌아왔다
유진우 기자
입력 2023.03.21 06:00
20일 오전 회현역 5번 출구 옆 한 까페.
중국어를 쓰는 한 무리가 커피는 뒷전으로 미뤄둔 채 뜯지 않은 위스키 상자를 만지작 거렸다.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상자를 뜯자 진한 호박색 위스키가 가득 담긴 병이 따라 나왔다. 지문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병 뒤로 만면에 웃음을 띈 얼굴이 보였다. 곧 호탕한 웃음과 함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퍽 만족스러운 표정과 어조(語調)였다.
회현역 인근에는 신세계면세점 명동점이, 조금 더 가면 롯데면세점 명동본점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시내 면세점은 위스키를 저렴한 가격에 팔지만, 사서 바로 마실 수는 없다. 구입을 하더라도, 수령은 출국일에 공항에서나 가능하다.
세금 비중이 높은 위스키 특성상, 면세점에서 파는 위스키는 시중에서 파는 다른 주류보다 유난히 저렴한 편이다. 면세점 위스키 구매 수요 역시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인기 상품이나, 이미 수년전 판매가 끝나버린 예전 위스키들은 면세점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면세점 위스키를 찾는 소비자가 많은 만큼, 공급이 원활한 제품 위주로 구색을 갖추기 때문이다. ‘가격이 저렴하다’ 싶은 상품들은 순식간에 동이 나버리고, ‘비싸서 안 팔리는’ 상품은 금방 다른 제품으로 바뀐다.
회현역 5번 출구에서 나오자 마자 ‘남대문 4길’을 따라 두 블록만 직진하면 고딕 글자체로 ‘수입명품상가’라고 투박하게 적힌 간판이 나온다. 간판 인근에는 오래된 안경점과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 김과 연예인 사진을 파는 잡화점, 양말과 신발이 잔뜩 걸린 옷 가게 등이 줄지어 자리잡고 있다.
20일 이 지역에는 코로나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적잖이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갔다. 상인들은 골판지 상자에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를 같이 쓴 채 호객 행위를 했다. 일부는 밥 먹을 시간도 없다는 듯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이른 점심을 차려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잡다가, 밥 한술을 떠먹길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차도르를 쓴 여성 관광객과 일본어를 쓰는 남여 관광객이 좁은 시장길을 오갔다.
다소 산만해 보이는 이 곳은 소위 ‘남던’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남던은 ‘남대문 던전(dungeon)’을 줄인 말이다. 던전은 영어로 ‘지하 감옥’을 뜻한다. 시장 안에 오밀조밀 자리잡은 상가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책상 서너개쯤 붙여놓았을 법한 넓이 진열대에 위스키 수백병을 늘어놓고 파는 주류상들이 스무곳 남짓 자리잡고 있다.
남대문 수입명품상가 내 한 주류전문매장. /유진우 기자
남대문 수입명품상가 내 한 주류전문매장. /유진우 기자
이곳에는 가격표도, 바코드도 없다. 오로지 진열장에 불규칙하게 놓인 물건을 눈으로 확인하고 적당히 가격을 흥정해야 한다. 인터넷 상에서는 이 모습이 마치 판타지 게임 속 던전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해서 남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이 곳은 ‘성지(聖地)’로 통한다. 정신 사납고, 노후한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이 곳은 시세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현재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위스키를 여느 곳보다 싸게 살 수 있다. 남던은 대형마트처럼 정가제가 아니라 같은 위스키라도 옆 가게와 앞에 가게 값이 다르다. 보유한 물량 역시 일정하지 않아 1~2병 뿐인 위스키가 수두룩 하다.
그러나 안목만 있다면 마트나 편의점을 포함한 멀끔한 주류 매장에서 이미 오래 전에 팔려서 사라진 ‘올드 보틀’ 혹은 몇 병 국내에 풀리지 않은 보석 같은 희귀 위스키를 심심치 않게 구할 수 있다.
이날 이 곳에서도 중국어를 듣기란 어렵지 않았다. 석진상회, 안성상회, 골드컴퍼니 같은 이 지역 터줏대감 상인들은 외국인 관광객이다 싶으면 한국어 대신 계산기에 가격을 찍어 대답했다. 일행과 함께 온 소비자 가운데 일부는 이 가격을 놓고 같이 온 사람들과 중국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상가에서 20년 이상 일했다는 남대문시장상인회 관계자는 “작년부터 간간히 중국인 손님이나 외국인 손님들이 오곤 했는데 실제로 위스키를 사가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 구경만 하고 말았다”며 “이번 달부터 확실히 위스키를 사가는 외국인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오늘도 방금 전 문 열자마자 외국인 손님한테 40만원 짜리 위스키 한병을 팔았다”며 “보통 10만~15만원 하는 위스키를 많이 사가는 우리나라 손님보다 비싼 위스키를 사가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본토에서 위스키는 사치품 대접을 받아 가격이 높을 뿐 아니라, 수요에 비해 공급이 현저히 적다. 브랜드에 상관없이 고가 위스키라면 벌써 수년째 품귀 현상을 겪고 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 단체인 스카치위스키협회(SWA) 발표에 따르면 중국은 2021년 금액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스카치 위스키 수출 시장이다. 2021년 중국 스카치 위스키 수입액은 1억9800만 파운드(약 3156억원)로 2020년보다 85%, 2019년 대비로 123% 급증했다.
양으로 보면 중국은 스카치위스키협회 통계 기준 주요 10대 수출국 명단에 들지 않는다. 수입하는 양에 비해 수입 금액이 높은 이유는 그만큼 중국에서 고가 위스키 수요가 많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픽=손민균
그래픽=손민균
위스키는 수년 동안 숙성한 원액으로 만들기 때문에 수요가 늘었다고 공급을 한번에 늘릴 수는 없다. 중국 내 고가 위스키 수요가 치솟더라도 세계적인 대형 주류 기업들이 마땅히 이 수요를 따라갈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각 상회에 따르면 이들이 선호하는 제품은 대체로 15년 이상 숙성한 20만~30만원 사이 스코틀랜드와 미국 위스키다. 특히 중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미국 켄터키 지역 버번 위스키 선호도가 높다.
한 주류 전문 상회 관계자는 “중국인 손님들은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발베니나 스프링뱅크 같은 스카치 위스키 대신 블랑톤(Blanton’s)이나 러셀 리저브 싱글배럴(Russell’s Reserve Single Barrel) 같은 수십만원 대 미국 위스키를 귀신 같이 찾아낸다”며 “중국 현지에서 프리미엄 미국 위스키는 정치적인 문제까지 개입해 수입이 원활하지 않고, 가격도 비싼 데 한국에서는 이런 위스키들이 잘 팔리지 않아 구하기 쉽다는 말을 한다”고 전했다.
고가 위스키에 목이 마른 중국인 위스키 ‘원정 쇼핑’ 수요는 당분간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나라 국가별 외국인 입국자수 회복률을 보면 지난 2022년 12월 싱가포르인 관광객이 2019년 12월 대비 120.1%, 미국인 관광객이 81.9%, 독일인 관광객이 79.7%를 기록했다.
반면 중국인 입국자 수는 지난해 12월 기준 5.4%에 그쳤다. 다른 국가 대비 중국인 입국자 수는 여전히 현저하게 적다. 그러나 이달부터 중국발(發) 입국자에 대한 PCR 의무가 풀리면서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중국인 관광객 수는 급격히 상승 중이다.
브랜드 포지셔닝 전문가인 김소형 데이비스앤컴퍼니 컨설턴트는 “현재 중국에서 위스키 열풍을 주도하는 소비자 층은 우리나라처럼 위스키를 혼술로 한두잔 정도 마시는 30~40대 젊은 애주가들”이라며 “이들과 한국을 자유여행으로 찾는 중국인 여행객은 연령대와 소비 성향 측면에서 상당히 겹친다”고 분석했다.
이어 김 컨설턴트는 “마치 우리가 일본에 위스키 원정 쇼핑을 떠나는 것처럼 중국인들은 우리 나라에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온다고 보면 된다”며 “장기적으로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수요공급 차원에서 남대문 시장 위스키 가격은 이전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