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무기 집중이 오히려 독? 최강 미국이 전쟁 못이기는 이유
이철민 선임기자
입력 2021.08.19 17:24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다. ‘유일한 수퍼파워’ ‘냉전의 승리자’ ‘초강대국(hyperpower)’ ‘모든 스펙트럼의 지배자(full-spectrum dominance)’ 등 미국을 가리키는 표현은 많다. 그런데 실제 전쟁 성적표를 보면 초라하다.
뉴욕주립대(알바니)의 역사사회학자인 리처드 라크먼 교수는 “1945년 이후 미국이 싸운 주요 전쟁(한국‧베트남‧걸프‧이라크‧아프가니스탄) 중에서 명백한 승리는 아버지 부시 때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격퇴하는 제한적 목적의 전쟁이었던 1991년 걸프전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초경량급’인 도미니카 공화국(1965)‧그레나다(1983)‧파나마(1989)를 침공해 이겼다. 이밖에, 시리아‧아프리카‧예멘‧리비아 등에 미군을 파병했다가 내전에 휩싸이고 아무 성과 없이 철수했다.
2015년 12월23일,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미 공군기지에서 한 미군이 자살폭탄 테러 공격으로 숨진 6명의 미군 유해를 향해 울먹이며 경례를 하고 있다./AP 연합뉴스
2015년 12월23일,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미 공군기지에서 한 미군이 자살폭탄 테러 공격으로 숨진 6명의 미군 유해를 향해 울먹이며 경례를 하고 있다./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뒤인 2017년 2월 “내가 고교, 대학 때는 모두들 ‘우리는 절대로 전쟁에서 안 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도무지 이기지 못한다. 계속 토하듯이, 계속 싸우기만 한다”며 “앞으로 지겹게 이기도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왜 수퍼파워 미국은 더 이상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라크먼 교수는 지난 4월 18일 로스엔젤레스타임스에 기고한 ‘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가 계속 전쟁에서 지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 원인을 ▲전쟁 양상이 변했는데도 첨단무기 개발에만 집착하는 미 국방부 ▲전사자 수에 대한 미국 사회의 민감한 반응 ▲전쟁 지역 국민들과의 괴리 등으로 꼽았다.
◇90%의 전쟁은 ‘내전’인데, 미 국방부는 첨단 무기 개발에 집중
미국 스워스모어 칼리지의 도미니크 티어니 교수는 “미국은 지금도 2차 대전 같은 전쟁은 성공적으로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1945년까지 주요 전쟁을 모두 이겼다. 모두 국가 간 전쟁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이 치르는 전쟁의 90%가 반군 진압과 같은 내전이다. 티어니 교수는 “그런데도 미국은 아직도 전쟁을, 유니폼 입은 양쪽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맞붙어 점수를 내고 끝나면 승리해 귀가하는 ‘수퍼볼’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적군이 유니폼도 없고, 승리를 정의(定義)하기도 어렵고, 미국이 승리하는 ‘끝’을 예상하긴 더욱 힘든 대(對)테러와 반군 진압 작전이다. 그는 “미국이 탈레반을 궤멸시키지 못한 것은, ‘그동안의 전쟁에서 교훈을 얻었다’는 미군 수뇌부가 사실은 여전히 효과적인 반군 진압 전략을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따라서 미군에게 절실한 것은 이런 전투에 이길 전술 개발과 훈련, 값싸고 단순한 무기들이다. 그러나 미 국방부 고위 장성이나 관리들은 중국‧러시아를 겨냥한 첨단 무기에만 관심을 갖는다. 왜 그럴까.
라크먼 교수는 “주요 장성들과 미 방위산업체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고위 관리‧장성들은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무기를 개발하고 지휘해야, 경력에 도움이 된다. 전역 후에도 관련 업계에서 일할 수 있다. 그는 “이성적인 장교라면 개발에 수십 년 걸리는 하이테크 무기를 중심으로 경력을 쌓지, 간헐적인 반란 진압에 군 경력을 쏟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수십 년간 계속 합병을 거듭해 몇 개 안 되는 미국의 ‘공룡’ 방산업체들도 고(高)마진 이익이 보장되는 첨단무기 개발을 선호한다.
◇미군 전사자 수에 민감한 미 대중
이는 5만800여 명이 전사하고 30여만 명이 부상한 베트남 전쟁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후 미군의 전쟁 전략은 가급적 전쟁지역 내 민간인과의 접촉을 줄이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정보 축적도 줄고 현지인들의 호감을 살 기회도 줄었다. 또 파병 규모는 줄고, 철군 속도는 빨라졌다. 미군 활동은 대부분 후방 기지로 제한된다. 모두 전쟁 승리를 가로 막는 요인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12월 미국 민간인 군(軍)계약업자 1명이 이라크에서 살해되자, 크게 흥분했다.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술레이마니가 암살되자, 많은 미국의 젊은이는 이란과의 전쟁이 임박했고 징집제가 다시 실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라크먼 교수는 “전사자 수에 이렇게 민감한 상황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이란과 전쟁을 하려고 해도, 드론‧미사일 공격, 고(高)고도 폭격 외에 옵션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란은 인구‧군사력‧면적에서 2003년 이라크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나라다. 초강대국 미국의 현실이, 이라크처럼 이란을 물리적으로 침공해 승리를 선언하기는 매우 힘들다는 얘기다.
◇현지인들 “전후 복구에서 미국인만 돈 번다” 반감
전쟁 지역 국민들은 21세기 들어 미국 정부가 자국에서 ‘약탈적 신(新)자유주의’를 한다고 생각한다. 이라크 중앙부처와 미군 주요 시설, 대사관 등이 밀집한 바그다드의 ‘그린 존(Green Zone)’을 구축해 떼돈을 번 것은 미 건설업자들이었다. 이라크 현지인들은 제외됐다. 미군은 신뢰할만한 현지인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못했고, 분노한 현지인들은 반군 지원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성공에 필요한, 전쟁 지역의 호감을 사야 하는데 실패했다. 아들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neocons)들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인들은 이라크의 대규모 유전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제로섬(zero-sum)’ 게임처럼 미국인들에게 부(富)가 이동됐다고 생각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132억 달러(현재 가치 1400억 달러 이상)를 들여 유럽을 재건하는 ‘마샬 플랜’을 집행했고, 이 덕분에 미국 주도의 국제‧금융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샬 플랜의 많은 수혜자는 유럽 기업들이었다.
라크먼 교수는 “어느 미국 대통령도 이렇게 체제 깊숙이 자리 잡은 장애요소들을 극복하기는 힘들다”며 “게다가 대통령에게 전쟁 조언을 하는 장군들은 여전히 ‘어떤 적국도 압도적인 첨단 기술과 재정적 우위를 토대로, 제압할 수 있다’는 오만과 환상에 젖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 오만 탓에, 이라크 전쟁이 절정이던 2006년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의 미국인 직원 1000명 중에 아랍어 가능자는 고작 6명이었다.
미국은 이기지도 못하고, 익숙하지도 않은 전쟁에 왜 계속 뛰어드는 것일까. 티어니 교수는 “백악관은 전후 질서 회복이나 안정화 작업, 재건 노력은 미국이 피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담 후세인만 제거하고 바로 미군을 빼면, 독재자가 사라진 이라크에서 이라크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울 줄 알았다. 이 환상을 깨달은 버락 오바마는 “더 이상 이라크 전쟁은 없다”고 했지만,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의 몰락 이후 나토(NATO)군의 일원으로 미 공군과 해군은 또다시 들어가 7개월간 리비아 내전에 휩싸였다. 나중에 오바마는 “대통령 재직 중 최대 실책”이라고 시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