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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까지 ‘부조리한 삶’ 화두 놓지 않았던 ‘시대의 지성’ 이어령의 89년

 

 

 

선명수 기자입력 : 2022.02.26 18:15 수정 : 2022.02.26 18:33

 

 

1960년대 김동리 등 기존 문단 비하며 젊은 논객으로 등단

경향신문 여적 집필 논설위원, 파리특파원 등 역임한 언론인

강단과 행정 오가며 89세까지 집필한 문인이자 문화기획자, 행정가

 

 

 

 

 

2020년 책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시작하며 경향신문과 만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경향신문 자료 사진

2020년 책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시작하며 경향신문과 만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경향신문 자료 사진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26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유족 측은 이날 이 전 장관이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고, 말기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생애 마지막에는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했다.

1933년(호적상으로는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 언론인, 교수, 행정가 등으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석학이다. 고인은 부여고등학교와 서울대 문리과 대학과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56년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에 발표하며 평단에 데뷔했다. 문단 원로들의 권위 의식을 신랄하게 질타한 그의 글은 문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스물셋 청년이었던 고인은 이 글에서 주류 문단의 가식적 행태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문학이 저항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문단의 거두였던 소설가 김동리, 시인 조향, 소설가 이무영을 각각 ‘미몽(迷夢)의 우상’ ‘사기사(詐欺師)의 우상’ ‘우매(愚昧)의 우상’이라고 질타했다.

이 글로 문단에 반향을 일으킨 그는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로 떠올랐다. 동시에 ‘우상의 파괴’ 이후 고인은 당시 한국 언론들이 가장 탐내는 칼럼니스트가 됐다. 1960년부터 언론계에서 당대 최고 논객으로 활동했다. 1960년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1972년까지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사 논설위원을 거쳤다. 고인이 논설위원으로 언론사에 처음 발탁될 때 나이는 불과 스물일곱이었다. 1968년 시인 김수영과 문학의 현실 참여를 두고 ‘불온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어령 전 장관이 경향신문 1959년 2월9일자 4면에 기고한 ‘영원한 모순-김동리씨에게 묻는다’.

 

이어령 전 장관이 경향신문 1959년 2월9일자 4면에 기고한 ‘영원한 모순-김동리씨에게 묻는다’.

 

 

 

 

 

 

1972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재직 당시 이어령 전 장관(왼쪽)이 소설가 김은국과 대화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2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재직 당시 이어령 전 장관(왼쪽)이 소설가 김은국과 대화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인은 경향신문에선 주요한 시인(1900~1979)에 이어 단평 칼럼 ‘여적’을 맡아 집필했다. 주 시인의 ‘여적’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 독재를 통렬하게 비판해 당시 정권이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도화선이 됐던 칼럼이다. 이후에도 여적은 정권에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해 고인은 ‘여적’에 쓴 글들로 송기호 당시 경향신문 논설위원과 함께 중앙정보부의 취조를 받았다. 훗날 고인은 “여적을 쓰던 그 기간이 내 생애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보람있던 황금기”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현장 기자 경력이 전무했음에도 그는 1973년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으로 발탁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비롯해 콘스탄틴 게오르규, 외젠 이오네스코, 가브리엘 마르셀 등 당대 세계적 작가들과의 대담을 기사화했다.

 

 

 

1973년 84세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오른쪽)을 인터뷰하고 있는 이어령 당시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3년 84세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오른쪽)을 인터뷰하고 있는 이어령 당시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파리특파원 이후 언론계를 떠난 고인은 평론가로서, 또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1967년 이화여대 강단에 처음 선 고인은 1989년까지 이 대학 문리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95년부터 2001년까지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다.

고인은 평생에 걸쳐 수십 권의 책을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가였다.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초기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 문화를 분석해 ‘한국 문화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기념비적 저작이란 평을 받는다. 출간 1년 만에 30만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이자, 해외에서도 번역본이 나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인은 이 책으로 ‘언어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7년 월간 한국문학에 연재하며 쓴 장편소설 <둥지 속의 날개> 등 다수의 문학 작품도 남겼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1980년대로, 인간의 영원한 내면 세계를 다루면서도 문명 비평적 요소도 있는 저작이다.

또 다른 대표작인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고인이 일본 외무성 초청 도쿄대 비교문학과 교수(1981~1982)로 재직하던 시절 집필했다. 일본 고전 문헌에 대한 자료와 그간의 일본인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토대로 일본사회와 일본인을 투시한 책으로, 한국인이 쓴 책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일본사회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고인은 2006년에 펴낸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 시대에 대한 통찰을 내놓기도 했다. 그가 만든 ‘디지로그(Digilog)’란 용어는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시대적 흐름을 나타내는 말로, 그는 디지털 기술의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들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이 산업화에서는 뒤처졌지만 정보화와 디지털에서는 선두주자가 될 수 있다고 설파했던 고인은 이 책에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디지로그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칠십대 노년에 이르러 무신론자에서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 된 고인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2008)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 등의 저작을 통해 개신교 신앙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미국에서 검사로 활동하다가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장녀 이민아 목사의 암 투병을 겪으며 고인 역시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목사는 위암 투병 끝에 2012년 별세했다.

고인이 생애 마지막까지 몰두했던 저작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다. 2020년 시리즈의 첫 권인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하며 고인은 “생과 죽음이 등을 마주 댄 부조리한 삶. 이것이 내 평생의 화두였으며,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죽음 아닌 탄생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고인은 이 책에서 ‘21세기 패관(稗官·민간에 나도는 풍설, 소문을 수집하던 일을 하던 옛 말단 벼슬)’을 자처하며 온갖 텍스트와 인터넷에서 떠도는 집단 지성을 채록하고 재구성해 ‘한국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지난달 출간한 <메멘토 모리>는 그의 생애 마지막 저서가 됐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별세 한달 전 가톨릭 신부에게 물은 24가지 질문에 병마와 싸우고 있던 고인이 자신의 관점으로 답한 책이다.

 

 

 

 

 

경향신문 1990년 1월4일자에 게재된 사진. 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되고,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한 이어령 장관(윗 사진 오른쪽)이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와 함께 문화부 현판을 걸고 있다. 아래 사진은 초대 공보처 장관 최병렬 장관이 강영훈 총리와 함께 공보처 현판을 걸고 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1990년 1월4일자에 게재된 사진. 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되고,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한 이어령 장관(윗 사진 오른쪽)이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와 함께 문화부 현판을 걸고 있다. 아래 사진은 초대 공보처 장관 최병렬 장관이 강영훈 총리와 함께 공보처 현판을 걸고 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밖에 <이것이 한국이다>(1986) <세계 지성과의 대화>(1987)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1997) <생명이 자본이다>(2013)와 같은 책을 비롯해 소설과 시집, 평론집까지 수많은 저작을 펴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은 행정가로, 또 문화기획자로도 족적을 남겼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괄 기획을 맡았고, 냉전의 종식을 상징하는 ‘벽을 넘어서’라는 올림픽대회 구호를 만들었다. 개회식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굴렁쇠 소년’을 연출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 당시 문화공보부를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하며 1990년 1월 출범한 문화부의 초대 장관을 맡아 이듬해 12월까지 재임했다. 장관 재임 기간 동안 국립국어연구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전통공방촌 건립, 도서관 업무 이관 등 공약했던 ‘4대 기둥 사업’을 마무리했다. 장관 시절 도로 폭 밖의 가장자리 길인 노견(路肩)을 순우리말 ‘갓길’로 바꾼 것도 잘 알려진 일화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조시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로 추모하고 국가장의 유족 측 장례위원에도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문학평론가인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학교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장례는 5일간 가족장으로 치러질 계획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2015년 12월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 당시 그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며 눈엣가시로 여긴 경향신문에서 ‘여적’과 에세이를 쓸 때가 인생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회고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2015년 12월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 당시 그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며 눈엣가시로 여긴 경향신문에서 ‘여적’과 에세이를 쓸 때가 인생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회고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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