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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르포] 신문 찍듯 ‘컴퓨터 두뇌’ 찍어낸다...성대 유연컴퓨터 개발연구센터 가보니
롤투롤(R2R) 인쇄 유연컴퓨터 개발 연구센터 현장 르포
신문 찍듯 CPU 생산
제작 간편하고 친환경적
대기업, 해외 연구소도 포기한 연구
“안정적인 장기 지원이 연구 성공 비결”
R2R 인쇄 유연컴퓨터 개발 연구센터에 있는 클린룸에서 연구원들이 장비의 작동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수원=이병철 기자
수원=이병철 기자
입력 2023.06.23 13:14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무선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주변 모든 사물이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의 활용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초연결 사회가 되면 IoT 장비의 숫자도 크게 늘면서 반도체 산업의 지형도 빠르게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높은 연산 성능이 필요한 계산은 중앙의 컴퓨터에서 처리하고 IoT는 간단한 연산을 맡는 클라우드 컴퓨팅의 활용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관련 기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환경에 걸맞는 반도체는 더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고 환경 오염도 적으며, 기존 반도체 생산 공정과 다른 방식인 마치 신문처럼 대량으로 찍어내는 인쇄 방식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다소 생소한 이 방식은 한때 큰 주목을 받았지만, 기술적 난항으로 대부분의 연구가 중단된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71,600원 ▲ 300 0.42%), LG전자(123,300원 ▼ 2,100 -1.67%) 같은 대기업이 개발에 나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모두 중단됐다. 이제는 성균관대에 있는 ‘롤투롤(R2R·신문 인쇄처럼 대량으로 인쇄회로 기판을 만드는 방식) 인쇄 유연컴퓨터 개발연구센터’가 유일하게 남아있다.
R2R 인쇄 유연컴퓨터 개발 연구센터에 있는 반도체 생산 설비. 일반적인 반도체 공정과 달리 얇은 필름 위에 전기회로를 인쇄하는 방식이다./이병철 기자
22일 수원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N센터에 있는 R2R 인쇄 유연컴퓨터 개발 연구센터에 들어서자 한켠에 마련된 클린룸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유의 노란빛을 내는 노광실용 조명 아래에는 인쇄소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인쇄 장치가 돌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롤을 따라 돌아가는 투명한 필름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R2R 인쇄 유연컴퓨터개발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는 조규진 성균관대 생물물리학과 교수는 “연산장치(프로세서) 회로가 그려지고 있는 모습”이라며 “인쇄와 비슷한 방식을 이용해 쉽게 구부릴 수 있는 플렉시블 프로세서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R2R 인쇄 유연컴퓨터개발 연구센터는 2020년부터 선도연구센터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플렉시블 프로세서의 생산 공정을 개발하고 있다. 7개 이상 분야의 교수급 연구자와 수십명의 연구진이 이곳에서 한창 연구 중이다.
R2R 인쇄 유연컴퓨터 개발 연구센터에 있는 클린룸에서 연구원들이 장비의 작동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이병철 기자
R2R 인쇄는 마치 신문을 찍듯이 두 개의 롤러가 맞물려 돌아가며 필름 위에 회로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활용하면 구부러지거나 늘어나는 특성을 가진 필름 위에 전자회로를 인쇄할 수 있다. 실리콘 반도체보다 높은 성능을 내기는 어렵지만 생산 방식이 간단하고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
이 방식으로 반도체를 만드는 방법은 단순하다. 원하는 목적에 맞게 반도체 회로를 설계하고, 필요한 특성을 가진 필름 위에 전자잉크로 회로를 인쇄하면 된다. 문제는 한 번의 인쇄만으로는 원하는 회로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필름이 롤 위에서 반복적으로 회전하면서 인쇄를 해야 한다. 그만큼 이미 인쇄된 패턴에 맞춰서 그 위에 정확하게 회로를 쌓는 것이 성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조 교수는 “일반적인 실리콘 반도체는 깎아가면 만들지만, R2R 인쇄로는 회로를 한 줄씩 쌓아서 만드는 방식”이라며 “그래서 얼마나 정교하게 기존에 인쇄된 위치에 맞춰서 인쇄하는지 ‘중첩 제어’가 가장 중요하고, 정밀한 공정을 만드는 것이 연구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R2R 인쇄를 이용해 제품 라벨로 사용할 수 있는 전자 회로를 인쇄한 결과물. 사용자가 편하게 제품 정보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이병철 기자
인쇄된 위치에 맞춰 재인쇄하는 작업이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다. 기계적으로 작은 오차만 발생하더라도 인쇄해야 하는 위치를 벗어나면 성능은 크게 떨어진다. 실제로 R2R 인쇄의 핵심 장비 중 하나인 롤 표면의 거칠기가 수십㎛(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만 되더라도 인쇄에는 오차가 생긴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 정도의 정밀도를 구현할 수 있는 업체가 많지 않다. 일본에서 거칠기가 3~4㎛ 수준인 롤을 수입하려고도 했지만, 국외로 반출할 수 없다고 해 이마저도 실패했다.
조 교수는 “높은 정밀도가 필요한 작업인 만큼 해외에서도 대부분 R2R 인쇄 프로세서 연구를 포기했다”며 “기반 기술이 첨단 산업 연구에도 중요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플렉시블 프로세서를 개발하려는 이유는 높은 시장 가치에 있다. 앞으로 엣지컴퓨팅용 프로세서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전망이지만 실리콘 반도체만으로는 이를 모두 소화할 수 없다. 생산 비용은 물론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도 R2R 방식이 훨씬 적다.
물론 연산 성능은 실리콘 반도체를 따라가기 어렵다. 현재 구현할 수 있는 성능은 4비트(bit)로 초기 실리콘 반도체 수준이다. 그러나 높은 연산 성능이 필요한 작업은 중앙에서 처리하고 상용 장비에서는 간단한 작업만 처리하는 클라우드 컴퓨팅이나 엣지 컴퓨팅을 적용하면 효율적인 사용이 가능해진다. 센터에서는 현재 논리회로 30여개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고 앞으로 1000개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는 쉽게 구부러지는 특징을 활용해 제품 포장지에 적용할 수 있는 프로세서를 연구하고 있다. 제품 정보를 회로에 담아 개별 포장을 하면 소비자가 스마트폰으로 근거리무선통신(NFC) 방식으로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칩에 프로세서, 메모리, 통신 회로를 모두 구현했다.
안찬엽 R2R 인쇄 유연컴퓨터 개발 연구센터 연구원이 필름 위에 인쇄한 프로세서를 들고 서 있다./이병철 기자
조 교수는 기업에서도 하기 어려운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장기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센터를 지원하는 선도연구센터 지원 사업은 1990년 처음 시작된 이래로 33년간 38개 대학의 279개 과학·공학 분야 선도연구센터에서 총 2조118억원의 지원이 이뤄졌다. 연구 성과도 투자대비 최고 수준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선도연구센터 지원을 받는 연구단은 2021년 기준 6만609편의 과학기술인용색인(SCI) 논문을 발표했다. 특허도 5297건을 등록하고 석사 이상 전문 인력을 3만7568명 배출하기도 했다.
이날 앞서 성대 삼성학술정보관에서 열린 ‘2023년 선도연구센터 릴레이 성과교류 및 간담회’에서는 과학분야, 공학분야의 우수성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날 총 과학분야 3개 연구센터는 비임파성 장기 면역, 인공 중성자별을 이용 고에너지 물리학, 반려동물과 인간의 질병을 연구하는 비교의학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또 공학분야에서는 R2R 인쇄 유연컴퓨터 개발을 비롯해 플라스틱 대체 에어로겔 개발, 빛을 이용한 질병 진단센서 연구 성과가 발표됐다.
이병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