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전당대회 이야기
온라인 제승방략 <1편> (이준석)
by
이준석
2023-03-21
지난 전당대회에서의 교훈은 ‘제승방략(制勝方略)’이다. 우선 제승방략은 조선 시대 병법서의 이름이다. 전당대회를 분석하면서 웬 병법서가 나오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전쟁이 누군가의 용력(勇力)으로 치러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큰 의미의 전략에서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고, 역사 속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그 궤를 되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더 나은 전략을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개혁 후보들이 채택한 전략은 사실은 백서를 따로 쓰면서 세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우선 간략히 짚고 넘어가면, 크게는 윤석열 정부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민심의 바람을 일으켜 완고한 당심을 움직이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언론 노출도를 극한으로 높여 각 후보의 인지도를 상승시키는 것이 전술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결국 바람은 크게 불지 않았다. 전술적 고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의 전당대회에 비해서 언론 지형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야당 시절에 정권 교체를 위해 가만히 있으면 정권을 내주고 세무조사 따위의 핍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때, 보수진영의 주요 언론은 이준석 돌풍을 깊이 있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천아용인 후보의 목소리는 그들이 정권 교체를 통해 재구축한 기성 질서의 아성에 대한 안티테제일 뿐이었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2주 정도 지난 뒤에 최근의 지지율 하락을 보며 당황한 각 언론사의 사설을 보면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테제에 충실한 지도부가 과연 총선 승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뒤늦은 고민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선거 기간에, 천하람 후보에게 부족한 것은 인지도였고, 후보 등록을 하고 컷오프까지의 조사에서 2강 구도 밖에 있었기 때문에 보수 언론은 천하람의 목소리를 다루지 않아도 될 나름의 정당성까지 확보했다. 2021년의 내가 치렀던 전당대회와 달랐다.
내가 평소와 다르게 여기까지 주저리주저리 푸념과 비슷한 남 탓, 환경 탓을 늘어놓는 것은 결국 항상 역풍도 뚫어낼 수 있는 선거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교훈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보수를 변혁시키고 대한민국을 바꾸겠다는 도전 속에서 간혹 순풍이 부는 예도 있겠지만, 우리가 가는 길에 역풍이 불 때가 더 많을 것이고, 역풍을 뚫고 천천히 전진하는 삼각돛이나 날씨와 관계없이 추진할 수 있는 동력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꾸준히 앞으로 가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나는 도널드 트럼프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입지전적이었다. 소위 기성 언론에서 그의 직설 화법을 비판하면서 길들이기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성 언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트위터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파하는 결단을 내렸다.
트럼프의 방식을 답습할 이유는 없지만, 앞으로 개혁 세력이 기성 언론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기반을 만드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언론을 배척하자는 취지는 아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의 목소리를 보도하기 주저할 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 ‘고공행진’이라는 팀 블로그도 존재하는 것이다.
글의 머리에 언급한 제승방략을 다시 꺼내어보고 싶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조선은 제승방략이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건 전쟁이 나면 도 단위로 병력을 소집해 집결지에 모아서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가 이끌고 회전(會戰)을 벌여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다. 우리가 임진왜란 초기에 본 상주에서의 이일(李鎰)의 패배는 경상도에서 모인 병력을 제때 인수하고 통솔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신립(申砬)의 충주 탄금대에서의 패배는 충청도 병사들을 모아서 정예화된 왜군을 대상으로 회전(會戰)을 벌여서 패했던 것이다.
진관체제 – 위키피디아 CC BY-SA 4.0
‘제승방략’의 시대가 오기 전에 조선에서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국방을 했다. ‘진관체제’란 국경선을 지키면서 수백 명 단위로 작은 성들에 모여서 적이 내륙으로 들어오는 동안 최대한 큰 타격을 입히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소규모 침략이 잦은 여진족 상대의 북방 전선에서는 의미가 있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다수 왜군이 침투하는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바뀌게 되었다. 단순히 노략질이 아니라 대규모의 병력이 침입했을 때는 대응하는 측에서도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서 맞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승방략 – 위키피디아 CC BY-SA 4.0
조선은 상비군을 크고 강하게 키우기보다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통해 예비군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가 소집해서 나라를 지켰다. 전쟁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신속하게 인지하고 가용 가능한 병력에 상황을 빠르게 구석구석 전달하는 능력이 국가적 동원 체제이다. 기실 제승방략 체제나 현재 대한민국의 예비군 체제가 잘 동작하기 위해 서는 기본적으로 행정력이 잘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조선은 행정력에는 상당한 수준을 갖춘 나라였다. 충(忠)이라는 질서를 통해 사회 전반의 상하 구조를 만들었고, 효(孝)라는 규범을 통해 가족 내의 상하 구조를 만들었다. 질서와 개성은 상반된 가치이니 조선 시대에 특기할만한 발명이나 기술의 진보, 창의적인 경제적 활동의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조세를 내고, 누군가의 곤장을 치며 사화를 일으키는 기록은 매우 흔하게 남아있다.
지난 2021년부터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당대회, 대선을 거치면서 젊은 보수가 선거 때마다 주요한 역할로 선거에 영향을 주었던 방식은 온라인상에서 단기간에 강하게 집결해서 그들만의 밈(meme)을 만들어 상대 후보를 압도하는 여론을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평소에 회사를 다니면서도, 온라인에서 집결해서 정치적 의사표시를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천아용인 팀은 그 온라인 제승방략 전략에 가깝게 선거를 치렀다.
반면 윤핵관을 위시한 주류 세력은 지역별로 세밀한 조직을 가동했다. 지역별로 산재한 당협위원회 조직은 진관체제 내에서의 기지들처럼 하나씩 자리 잡고 있었다. 천아용인 후보들은 상향식 공천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것은 공천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반대로 윤핵관은 자의적인 공천을 할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세력이 윤핵관과 같이 이익을 매개로 한 조직을 구축할 방법은 없다.
윤핵관이나 지금까지의 정치권에서 해왔던 것처럼 소위 “조직”을 꾸리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선택이 아니다. 말을 쉽게 하지만 돈과 구태가 깃들어야 할 수 있는 것이 그런 조직이다. 매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공기업 감사와 임원으로 팬클럽 회장이나 캠프 구성원이라는 사람들이 기용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효율적인 매관매직의 방법임을 느끼지만, 그게 지향점이 되어서는 미래를 바라보는 정치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개혁 세력의 과제는 앞으로 치러질 수많은 선거에서 비슷한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갤럽 조사를 비롯한 여러 통계로 드러나는 일관된 경향은 전통적 보수층은 은퇴층과 가정 주부층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주중 낮에도 오프라인에서 모일 수 있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시간을 할애해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경쟁이라는 것이다. 진관체제에서 각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처럼 그들은 꾸준한 활동이 가능하다. 그에 반해 온라인 당원 가입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개혁 성향의 당원과 지지층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나면 소집되는 병사들처럼 평소에는 생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체계이다.
그렇다면 결국 빠른 정보 전달과 집결이 전술되어야 한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개혁 성향의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주기적으로 당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선거가 치러질 시기에 효율적인 방법으로 공약 등을 전달할 경로가 있어야 이들은 선거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앞으로 여러 개의 ‘집결지’가 필요하고, 그 집결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이 집결지를 만들어 내고 정보를 전파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이기인의 전당대회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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